Untitled Document
화가박수근 미술관소개 전시안내 관람예약 미술관소장품 교육프로그램 창작스튜디오 뮤지엄샵 커뮤니티
HOME > Artist Park > 아내의 일기
letter to wife
12 3456789
어머님의 간곡한 기도로 얻으신 아들.
그이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이다.

양구군(楊口郡) 양구면(楊口面) 정림리(井林里)에 80노령의 할아버지, 아버지 박형지(朴亨智), 어머니 윤복주(尹福珠)와 딸(그이의 누님) 세 분 이렇게 모두 여섯 식구가 부농가로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3대를 독자로 내려오는 집에서 딸은 셋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어 할아버지께서는 다른 며느리를 얻어서라도 손자를 보셔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버님의 양심은 도저히 그것을 허락지 못하셨다. 모세의 10계명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어머님께서는 항상 마음에 염려가 가득하셨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아들을 주십사고 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어머님의 간곡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또 딸을 낳을까 봐 몹시 걱정하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기도로 애원하셨다.

1914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어머님은 해산을 하시고 바라고 바라던 아들을 낳으셨다. 이 때 낳은 아들이 바로 나의 남편 성남(成南) 아버지이시다.

오랜 바람끝에 얻은 아들을 할아버지는 물론 집안식구 모두가 금이야 옥이야 하며 소중이 키웠고, 할아버지께서는 아기가 백일동안은 자리 귀를 넘지 않아야 좋다며 누구도 안고 나가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성남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퍽이나 순해서 젖만 먹으면 늘 잠을 잤다고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성남 아버지가 백일이 되기 며칠 전, 이웃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가 오셔서 아기가 귀엽다고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가셨는데 그것을 안 할아버님이 크게 노하셔서 이웃집 아주머니를 마구 나무라셨다는 것이다. 백일 동안 공을 드리면서 자리귀퉁이를 넘기지 않으려고 정성을 드리고 있었는데 백일 며칠 전에 자리 귀를 넘겨서 집안식구들은 모두 그 아주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원망을 하셨다는 이야기다.

아기가 세 살이 되자 어머니는 또 아들을 낳으셨다.

그 때 낳은 아들이 나의 시동생인 박동근(朴東根)이다. (1941년 7월에 신병으로 사망) 어머니는 동근이가 세살되어 또 아들을 낳으셨다. 그 때 낳은 아들이 현재 용두동에 살고 있는 성남이 작은 아버지 박원근(朴元根)이다. 3대 독자로 내려 오던 집에서 위로 딸 셋, 아래로 아들 셋의 6남매를 두게 되어 집안은 늘 화기에 차 지냈다.

성남 아버지가 다섯 살 되던 해 마을에 있던 서당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한문책을 둘러 메고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으니 웃지 못할 일도 많이 있었다. 하루는 소변이 보고 싶은데 허리끈을 미처 못 끌러서 겨울 솜바지에 오줌을 싸고 선생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 그 오줌싼 바지를 그냥 입고 집에 오는 데 때가 한겨울이었으니 오는 도중에 꽁꽁 얼어붙어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한다.

그이는 일곱 살까지 서당에 다녔고 그 해에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곱 살 되던 해는 그이에게는 불운이 오기 시작한 해였다. 그 해에 아버님께서 광산사업을 하시다 실패하였고 여름에는 홍수로 인해 모든 전답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가세는 기울게 되었고 가난에 허덕이는 날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에 큰 누님, 둘째 누님은 출가시키고 셋째 누님은 손포가 모자라서 당시에는 흔하게 있던 데릴사위를 들여 같이 살고 있었다.

성남 아버지는 일곱 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는 잘 못했으나 미술을 잘 그렸다고 한다.

내가 결혼했을 때 그이가 1학년에서부터 6학년까지의 성적표를 보여 주었는데, 다른 과목은 전부 乙, 丙, 丁이었으나 미술만은 甲上이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 총이 없어 丙丁으로 못 나갔구려"하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성남 아버지는 처음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도화(미술)시간에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을 보여 주시는데 얼마나 즐겁고 좋았는지 그 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림을 그려서 선생님께 제출하면 꼭 벽에 붙곤 하였다. 그래서 늘 도화시간만 기다려졌고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남 아버지는 12세 되던 해 밀레의 <만종>을 보고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늘 '하나님 저도 이담에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 때 학교 교장선생님이 일본 사람이었는데 성남 아버지의 그림 솜씨를 알고 항상 격려를 해 주시고 가끔 집에 찾아오셔서 그림 연필과 도화지도 사 주시며 그림을 열심히 그리라고 당부하시곤 하셨단다.

어머님께서는 광산사업에 실패를 하시고는 양잠(누에치기)원으로 계시면서 지방에 나가 양잠지도원으로 활동하셨다. 그 후 봉급 생활보다는 기술업이 나을 것 같아서 시계기술을 배워 시계점을 경영하셨다.

성남 아버지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은 하였으나 늘 도와주시던 교장선생님은 단념하지 않으시고 상급학교에는 진학을 못 하더라도 집에서 그림공부를 계속하라고 재료를 사 주며 후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성남 아버지는 산으로 들로 다니며 스케치를 하고, 농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나물 뜯는 소녀들의 모습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