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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admin)
등록일
2012.03.21
조회수
1189
제목
[전시 평론]양 구- ‘수근 수근 카페’ 건너편에 사는 현우 형에게
양 구
- ‘수근 수근 카페’ 건너편에 사는 현우 형에게

김 도 연(소설가)


현우 형!
형의 그림 애기보다 먼저 양구 얘기부터 해야겠네요. 그러니까 나와 양구…… 오래전 양구로 가던 나의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내 고향인 대관령에서 양구까지의 어떤 여행들에 대해. 그 마지막에 아마도 형의 오이 풀이, 눈 코 입도 없는 것만 같은 오이 풀이 오롯하게 고개를 들고 내 여행의 기록들을 물끄러미 바라봐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라봐 주지 않는다 하여도, 그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박수근의 그림 속 사람들처럼 따스하게, 조금은 쓸쓸하게, 그 굽은 등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나는 겨울날 화로 앞에 앉아 두 손을 펼쳐 추위를 녹이는 아이처럼 조금은 행복할 겁니다. 그러니까 양구, 양구라는 말을 가만히 중얼거릴 때처럼 따스할 겁니다.
양구. 소양댐 너머의 양구. 파로호의 양구. 광치령 너머의 양구. 대암산, 펀치볼, 해안 분지를 업고 있는 양구. 백범 김구를 암살한 자가 마지막으로 숨어 살던 양구. 무엇보다 박수근의 양구. 내가 짝사랑했던 여자가 안개 자욱한 소양강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의 양구. 그리고 지금 정림리 ‘수근 수근 카페’ 건너편에 사는 형의 오이풀 같은, 고독한 양구.
양구에 처음으로 간 것은 대학시절이었지요. 늦게 군에 간 친구를 면회 가는 길이었습니다. 춘천의 소양댐에서 양구 가는 배를 탔지요. 친구의 애인과, 그 애인을 남몰래 바라보는 나. 캄캄한 안개를 헤치고 도착한 그곳 양구에서 우리 세 사람은 밤새 술을 마셨지요. 동면 팔랑리에서 시작한 술자리는 후곡 약수의 ‘콩새’라는 카페까지 이어졌지요. 그 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속절없이 취하다 잠들었지요. 캄캄하고 싸늘한 방, 옆에 누워 있는 친구와 친구 애인의 속삭임은 꿈속까지 따라와 철사 다발의 가시처럼 나를 괴롭혔습니다. 콩새, 콩새, 콩새…… 그렇게 사랑의 말을, 이별의 말을 속삭였지요. 다음날 춘천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친구의 애인은 캄캄한 안개를 보면서 울었습니다. 나는 왜 우는 거냐고 화를 냈지요. 어떤 확답을 듣지 못한 친구의 애인은 계속 울음만 게워냈지요. 결국 안개 자욱한 소양댐의 파라솔 아래에서 우리는 다시 소주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인에게 어떤 확답을 줄 수 없었던 친구, 그 친구의 애인을 몰래 바라보는 나, 비처럼 줄줄 흐르는 안개. 양구, 양구, 양구…… 콩새, 콩새, 콩새…… 오이풀, 오이풀, 오이풀…… 어떤 가망도 보이지 않았던 청춘들이 찾아갔던 안개 캄캄한 뱃길. 형도 육지 속의 그 배를 타고 양구와 춘천을 오갔던 날이 있었겠지요. 오이풀, 오이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물 삼키며.
내가 형을 만난 건 춘천에서였지요. 효자동 산동네 망루 아래에 사는 형의 방을, 형의 노래를, 형의 그림을, 형의 시를 나는 몰래몰래 훔쳐보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물이 막 싹을 틔운 작은 종이 화분 몇 개를 선물로 받았던 적도 있었지요. 그때 형의 그림 속에서는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어디로 가고 있었지요. 달에 가려고 사다리를 놓기도 했지요. 가난한 거리의 악사는 바람 부는 날 기타 줄을 뜯으며 이렇게 미래를 노래했지요. 오이풀, 오이풀, 잃어버린 꿈을 닮은 오이풀. 고라니 똥처럼 둥글게, 둥글게 슬픈 오이풀, 오이풀……
어느 날 형은 춘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했지요. 오이 냄새가 나는, 오이풀 같은 양구로. 빨갛고 하얗고 까만 오이풀 같은 양구로. 새 두 마리가 날아가는 양구로. 그 새를 꿈처럼 그림자처럼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 양구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몰래 슬펐습니다. 객지에서 살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노래와 시, 그림이 전부인데 우리는 그렇게 쓸쓸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눈발 날리는 겨울날, 매운바람을 등진 채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서 함께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언젠가 그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나도 짐을 꾸려 폭설의 고향으로 돌아간 적이 있으니까요. 오이풀, 오이풀, 눈에 젖어 불이 켜지지 않는 성냥 알갱이 같은 오이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향으로 돌아간 내가 폭설과의 오래된 숙제를 하는 동안 형은 정림리의 박수근을 만났더군요. 박수근 마을에 내리는 함박눈 같은 고요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찾아가 다시 형의 근황을 훔쳐보고 싶어 마음이 한없이 근질거렸지요. 그러던 차, 아니나 다를까 형은 내게 멋진 제안을 건넸던 것입니다. “박수근 미술관에 아가씨가 있는데, 멋있어!” 대관령에서 양구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수밖에 없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지요.
그래서 만났지요.
오이풀을.
오이풀을 닮은 아가씨를.
그래서 우리는 양구의 중앙시장 자그마한 선술집에서 노래하지 않았던가요. 정림리 ‘수근 수근 카페’ 건너편에 자리한 형의 작업실에 가득한 오이풀 속에서 호호! 깔깔! 크크! 밤 기울도록 웃음을 나눴지요. 창밖엔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그 와중에도 나는 큐레이터 아가씨를 몰래 훔쳐보고. 뭐, 그러다 결국 바람도 맞고.
형, 다시 양구를 생각합니다. 양구로 돌아간 형을, 형의 노래를, 형의 시를, 형의 그림을 생각합니다. 양구는 어디로 들어가는, 어디로 나가는 입구일까를 곰곰 생각해 봅니다. 박수근 미술관을 관통하는 개울물을 생각합니다. 그 개울가에서 피어날 오이풀을 생각합니다. 소양호와 파로호의 꼬리가 알을 품듯 껴안고 있는 양구에서의, 형의 고독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밤입니다.
문득, 오이풀이 환해집니다. 고요하게.
그리고……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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