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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작품에 나타난 독자적 조형성의 근원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2-01-27 17:21:37 조회수 439
평론가 안소연 (삼성미술관 책임연구원)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논의로 우리들의 생각과 시선이 미래를 향하고 있는 지금, 박수근을 회고한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역설일지도 모른다. 이미 한 사람의 근대화가로 자리잡고 있고, 특히나 초라한 소시민의 군상과 화석을 연상시키듯 고졸하고 경화된 그의 화면은 변화와 속도, 그리고 소프트화를 추구하는 현재 우리의 이상과는 많은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에 한 발 앞서 나가려는 경쟁이 치열할수록 더 많은 좌절에 부딪혀 본 경험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고 그럴 때마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가난했지만 결코 메마른 적 없었던 우리의 옛 모습이었다. 나목으로 상징되는 헐벗은 시대를 표현하면서도 그 의연함만은 잃지 않았던 박수근의 작품세계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살면서 상실하기 쉬운 휴머니즘의 가치를 새롭게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장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국제적인 화가로 자리잡은 그의 조형적 실천을 재평가함으로써 국제화의 미로 속에서 길 찾기에 여념이 없는 오늘날 우리의 미술계가 정체성의 숙제를 풀어 나가는데 하나의 지침을 삼을 수 있으리라는 바램이 있다.

박수근을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작가로 자리 매김하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어른의 손바닥 두 개를 펼친 것 만한 작은 화면에 그는 20세기의 회화가 갖추어야 할 온갖 미덕들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캐낼 수 있는 당대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고 시간의 흔적을 퇴적한 역사 서술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문학 작품으로도 전개가 가능한 내면적 서사구조를 함축이 있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그 모든 이야기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20세기 미술사가 애써 추구하려 했던 평면적인 조형성을 포착하고 있어서 내용과 형식 그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제작시기를 막론하고 박수근의 작품 하나 하나가 깊은 의미와 되짚어 보고싶은 여운을 갖는 이유는 거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그의 전작들을 차례로 훑어보노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매너리즘을 상기시키는 단조로운 조형언어의 반복이다. 화단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수채화 <봄이 오다>(1932)에서 농가풍경의 중심에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을 배치한 이래 1965년 작고할 때까지 그는 일하는 여인들과 현실의 각박함을 담담히 수용하는 서민의 모습, 그리고 헐벗은 풍경 등 몇 가지 중심소재들만을 반복적으로 대상화하였다.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은 한정된 중심소재라 할지라도 그것의 다양한 포즈를 유도해가며 시각적 변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같은 포즈를 여러 차례 밑그림까지 그려 가며 연습하고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박수근의 작품을 해석할 때, 초기의 굵은 윤곽선으로부터 중기의 기하적 도형에 가까운 형태와 마띠에르의 탐구, 그리고 말년에 둥글고 부드러우며 배경에 녹아 버린 선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변화에 주목하면서도, 같은 형상을 조합하거나 단순 반복을 거듭해가는 동일한 형상에 더욱 끌리게 되는 것은 외적인 현상에 주목하여 그것을 재현하는 구상화가로서 가져야 할 자연주의적인 시각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박수근 작품세계는 흔히 시대적 구분보다 유형적 분류 방법에 의해 이해되어 진다. 이것은 평자에 따라 종종 부정적인 측면으로 부각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를 박수근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상정해 보는 것이 어떨까.

 

회화적 이상향의 추구 : 동일한 소재의 반복

1914년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대를 이으려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태어난 박수근은 온순하고 겸손한 성격의 아이로 자라났고 일곱 살 되던 해부터 가세가 기울어 빈곤한 삶을 살게 되었으며 12살 되던 해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 스스로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갖았다...' 박수근의 평생의 반려자이자 성실한 내조자였던 김복순 여사가 꼼꼼히 회고한 <나의 남편 박수근>에서 성장기를 구성하는 여러 에피소드의 일부가 되는 위의 사실은 화가 박수근의 일관된 소재주의를 규명하고 더 나아가 그의 인생관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가난과 기독교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 성장기의 환경은 박수근의 삶을 구성하는 전제조건이 되는데, 그는 이 조건을 내재화함으로써 각박한 현실을 인내하고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보통학교 졸업 후 더 이상 학업을 이어 갈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던 빈곤은 그가 평생을 통해 짊어져야만 했던 굴레가 되었는데 박수근은 실제의 삶을 통해서나 그림 속에서 한번도 이러한 가난을 극복하려는 투쟁적 의지를 보이거나 반대로 좌절한 적 도 없이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였다. 그것은 가난이 식민지 국민으로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시대의 불행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이 빈민의 생활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던 당시의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1) 또한 시대의 비합리적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 기독교를 신봉하면서, 박수근은 이를 구사상을 타파하는 진보와 개혁의 방편으로 삼기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는 현실 희생적인 내세관에 입각, 현실 속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다. 이는 현실에 타협할 줄 몰라 언제나 패배하면서도 자신의 진실을 초월적인 것에서 보상받으려는 맑고 순수한 천성에 기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박수근이 이상적인 화가의 상으로 밀레를 꿈꾼 것도 박수근의 개인적 환경과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연유한다. 김영나 교수는 그의 논문 <밀레의 농민상 : 미국과 동아시아에서의 수용현상>에서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밀레의 대중성에 대해 논한 바 있다. 2) 밀레는 청교도 정신이 뿌리깊은 미국인들에게 쉽게 수용되어 1880년대에 대중적 인기의 절정에 달했고, 일본에서는 1890년 제2회 명치미술전람회에 실제 작품이 소개되었는가 하면 1903년부터는 밀레에 관한 책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밀레가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경로는 19세기말 미국선교사에 의한 전래와 일제시대 일본서적의 유입 경로 등 두 가지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으며, 1920년대에는 '밀레라 하면 근대인으로는 (그를) 어떠한 인물인지 모를 사람이 없을' 5) 정도로 대중들에게도 널리 소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화가를 꿈꾸는 어린이가 밀레를 위대한 스승으로 수용한 일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결과일 것이며, 최초의 농민화가로서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가난한 이웃을 대상화한 밀레야말로 박수근 자신의 현실을 밝혀 주는 우상적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수근이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 가 되기를 각오한 것은 19세기 사실주의의 거목으로서 대상의 재현에 뛰어났던 밀레로부터 그 훌륭한 기법을 이어받겠다는 각오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사실주의적 묘사의 요소가 남아있는 1930년대의 학습기 작품을 제외하고 박수근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사실주의와 멀어져 있으며, 대신 주관에 입각한 대상의 개념화가 추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미술교육은 물론 정규교육의 기회마저 갖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던 박수근이 성장기에 유일한 지침으로 받아들인 밀레는 과연 화가로서의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그것은 뛰어난 화가의 걸출한 기교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진지한 탐구심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숭고한 애정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박수근은 일생동안 서민들의 삶을 반복해서 형상화하고 심화함으로써 그 교훈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박수근의 그림 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여인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가사노동(빨래를 하거나, 아기를 돌보고, 절구질과 멧돌질을 하는 행위)을 하거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좌판을 벌린 그들은 언제나 나목으로 대변되는 각박한 현실 속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여성으로 대변되는 박수근의 인물들은 사회의 중심부로부터 소외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지만 가족을 위해 현실을 지탱해주는 대지와도 같이 모성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박수근의 그림이 비관적인 분위기로 흐르지 않고 삶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여성 이미지의 저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의 생애는 모성애에 대한 갈망으로 점철된 청소년기와 아내를 맞은 후 그것을 보상받고 더 나아가 자신 스스로가 모성애에 가까운 가족사랑을 실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0대에 맏이에 대한 정성이 지극했던 어머니를 유방암으로 잃고 가계몰락으로 풍비박산 난 가정을 떠나 버린 아버지 대신 가정살림을 도맡으면서 결손가정의 상실감을 절감한 바 있다. 이 일은 가난의 고통과 더불어 모성애의 목마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참혹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모성애의 가치를 잘 이해하였던 그는 결혼 후 아내를 배려함에 있어 '마치 친정어머님이 딸을 생각하셔서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 주시려는 것같이' 4) 행동했고, 그림의 소재에 있어서도 가장 자연스럽게 여성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인들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그의 삶이 필요로 했던 정신적 지주였고 더 나아가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했던 식민지와 6.25의 와중에서 남성부재의 상황을 견디며 삶을 지탱한 민족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존재로서 그의 그림의 중심대상이 되었다.


삶의 진실을 각인 : 형태의 정형화와 평면화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도상들은 같은 것이 몇 번 씩이나 반복해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화면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났던 도상이 군상의 형태로 조합되기도 한다. 비교적 다작의 작가로 알려진 그가 형태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보다 오히려 유형화했으며 형태의 세부묘사를 의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대상의 개별성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개별 작품의 분석에 앞서 밝혀져야 할 부분이며 박수근 작품세계의 독자성과 현대성을 논의할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대부분 사진자료로만 남아있는 6.25 이전의 작품들 중 초기 선전 입선작들은 당시 화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인상주의적 자연주의의 범주 안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학연과 지연이 전무한 그가 화단활동을 추구하면서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구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춘천, 포천 등지를 떠돌며 최악의 빈곤을 경험해야만 했던 그는 당시 선전 입상작들을 중요한 지침으로 삼아 스스로를 연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전의 출품작들은 대부분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이국취향을 만족시키는 지방색 짙은 향토주의 화풍이었고 그것을 조형화하는 방법은 서구의 고전주의와 인상주의가 적당히 타협한 일본식 아카데미즘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약관 18세의 나이로 선전에 입선한 수채화 <봄이 오다>와 이를 유화로 다시 그린 1939년작 <麗日>에서 박수근 역시 여느 선전 출품작가들의 작품과도 유사한 절충주의적 풍경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작가적 훈련이 다소 미숙한 초기의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박수근의 독자적인 주제의식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펼쳐진 집안 풍경의 한 가운데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을 위치시킴으로써 노동과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5) 이 주제는 형태적 반복과 단순화를 거듭하면서 더욱 심화되어 박수근 특유의 도상으로 자리잡는다.

박수근은 1937년을 전후로 유화도구를 장만하면서 형태적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유화라는 독특한 재료의 물성 탓인지 박수근의 유화는 이미 초기단계에서부터 이전의 수채화에서 추구되었던 재현적 묘사가 눈에 띄게 감소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원근법에 의한 공간의 묘사가 활력을 잃고 배경이 추상화되며, 대상 역시 사실주의적 비례감를 상실해 간다. 대신 형태를 견고해 보이게 하는 윤곽선이 점차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양상은 그와 그의 가족이 사선을 넘어 월남한 뒤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된 1953년 이후부터 더욱 두드러지는데 화면에서 구체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배경은 상실되고 대상들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몇 개의 선으로 환원되고 만다. 이 때 그의 화면은 더 이상 깊이를 갖지 않는 평면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격동과 고난의 시대, 20세기의 중반은 일제 식민지 말기의 악몽과 6.25 동족상잔을 경험한 우리민족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지구상의 인류 모두에게 있어서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정신적 외상이 실존주의 철학을 기조로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이라는 과격한 자아표출의 양식을 탄생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신상의 고초로 말하자면, 박수근의 삶이야말로 민족공동체의 불행과 개인적 고난을 함께 겪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의외로 견고하고 절제되어 있다. 그는 소중한 존재를 영원히 지울 수 없도록 각인이라도 하듯 대상의 임의적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고 추상화한 뒤 부동의 형식으로 고착화시킨 것이다.

박수근을 시대의 미술조류와 구별시키는 이 상반된 현상에 대해 우리는 그 이해의 근거를 보링거(Wilhelm Worringer)의 추상충동 이론에서 구해볼 수 있다. 인간과 외계의 현상이 범신론적인 친화관계에 놓여 있을 때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연의 유기적 아름다움과 자연주의에 열중하지만 외적 현상으로부터 커다란 내적 불안을 경험하게 될 때, 오히려 일종의 공간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관념적인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포가 이 세상에 신을 만들었다.' 는 말처럼 종교적 경건함이 배어있는 세계관을 창조하며, 그 대표적인 사례를 이집트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6) 전쟁 전후의 표현주의 화가들이 자기 분출적인 감정이입의 세계를 선택했다면 박수근은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한 환경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일시적인 감정을 노출하기 보다 형태의 단순화와 반복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삶의 진실을 추구하고 영속화는 방향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온유하고 바위처럼 변함이 없었던 그의 심성과 평화를 구하는 내세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 영속화의 대상은 생계를 위해 노동하고 가난을 감내하는 선량한 내 가족과 이웃들의 초상이다. 그것은 종교적 이콘Icon)의 장엄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에 비견되는 진실을 지녔다. 그들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결코 삶에 마모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물화에 필수적으로 드러나야할 초상의 특수 유사성을 제거했다. 그것은 실제 대상과 표현된 형상 간의 유사성의 소거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자신의 아내나 딸처럼 구체적인 모델을 대상화하면서도 임의적이고 우발적인 대상의 개인적 특성을 지워 나감으로써 개별 존재가 아닌 여인과 소녀의 전형을 이루었다. 또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농경사회였던 193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산업화의 단계에 접어든 60년대 중반까지 인물들의 외양을 한결같이 유지함으로써 현실의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고자 하였다. 표정이 제거된 그의 인물상은 돌에 새겨진 마애불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소박하고 선량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실주의를 포기함으로써 대상의 개별적 특성보다 보편적 개념성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트롱프 뢰이유(Trompe l'Oeil:눈속임)기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현대성을 획득하였다. 회화 평면 속의 가상적 깊이를 제거한 행위는 르네상스 이래 회화의 역사를 부정한 20세기 모더니즘과 정확하게 부합되는 부분인데, 사물과 비슷하지 않아서 당시에 매우 못 그린 그림으로 치부되었던 박수근의 그림은 공간감이 제거된 선묘 만으로 역설적이게도 20세기 회화사의 목표지점에 단숨에 도달하였다.

 

한국적 미감의 성취 : 재료 천착

작가로서 박수근의 학습배경을 이야기할 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그가 독학화가라는 점이다. 미술사에서 종종 언급되는 독학화가란 학력의 고하와는 무관하게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화가들을 일컫는데 박수근의 경우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은 물론 고등교육의 기회마저 갖지 못했던 최악의 경우에 속한다. 인문적 교양에 관한 한 그는 신문, 잡지 등에 기고된 기사를 탐독함으로써 보충해 나갔고 훗날 53년 경부터는 정신적 자양분이 될 만한 칼럼들을 꼼꼼히 스크랩하는 습관을 지속적으로 실천했다.

박수근은 보통학교 시절 도화시간에 유난히 소질을 드러내었고 이를 눈여겨 본 일본인 선생이 그를 격려하며 지도하였던 것 외에는 미술수련에 있어 스승을 갖지 못했다. 졸업 후 그는 뽕나무 가지를 구워 만든 목탄으로 기껏해야 산과 들을 사생하면서 대상을 조형화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갔다. 이는 그의 동시대 화가들이 주로 일본이나 프랑스 등 국외유학을 통해 서양미술사 지식에 근거한 아카데미즘 교육을 전수받았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조형적 묘사력의 측면에서 그들만큼 체계적인 기반을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15세기에 피렌체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래 미술교육의 근본취지가 형태(Disegno)파악과 자유로운 색채활용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러한 미술수련을 받지 못한 박수근이 날렵한 형태구사와 세련된 색채활용에 능숙하지 않았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실제로 1952년부터 54년까지 그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 그의 동료였던 박완서와 황종례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그리는 초상화는 소위 못 그리는 그림 축에 속해 미군 손님들로부터 퇴짜를 맡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은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세계에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서양화의 규격화된 교육과 진부한 아카데미즘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측면에 있어서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던 점이다.

이와는 별도로 그의 작품에서 기교적 숙달이 추구되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데 보다 설득력있는 근거는 그가 서양화라는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한 자신의 작품에서 외국 것의 어떠한 아류도 아닌, 민족미술 특유의 독자적 양식을 표현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 절에서 언급한 대로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형상을 본질만 각인하는 행위라든지, 빈곤한 색채활용에 대해 주호회(珠壺會)의 동료화가였던 황유엽 등이 여러 차례 지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빙그레 웃을 뿐, 색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않았던 점7) 등은 그것이 전통적인 서양화의 조형어법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가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이미지를 파악하는데 가장 합당한 방법이라는 판단에 의해서이다.

형태와 색채의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은 작가가 예외적으로 색다름을 추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띠에르이다. 형태와 색채가 사물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보다 개념적인 측면의 것이라면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마띠에르는 보다 물질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형요소이다. 그것은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성에 의해 취해지는 부분이므로, 마띠에르에 대한 관심은 그가 회화의 원칙을 고수하는, 후천적 교육에 의한 관학주의자가 아니라 자발적인 표현욕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천성적인 화가였음을 밝혀주는 부분이다.

회화적 표현에 있어서 마띠에르, 혹은 재료적 다양성의 측면은 흔히 원시미술 또는 소박파 화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미술의 영역이 두 개의 극단적인 방향으로 인도된다고 생각한 레비 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e)는 그의 저서 <야생의 사고>8) 에서 르네상스 이후 과학적 지식의 추구와 병행해서 발전하는 서구의 미술경향은 우연성을 배제하고 연구의 결과만을 작업에 적용하는 반면, 소위 미개하다고 치부되는 反아카데미 미술은 재료와 대화하는 것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갖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박수근이 작품활동을 전개하던 같은 시기에 유럽 앵포르멜의 몇몇 작가들, 대표적인 예로 쟝 뒤뷔페(Jean Dubuffet)와 같은 작가는 1945년 이후부터 캔버스 위에 회구층을 두껍게 바르는 오뜨 빠뜨(Hautes Pates) 기법을 시도하면서 재료와 형상 간의 공존을 추구한 바 있다. 서양화의 전통을 되돌아 볼 때, 형태로부터 그 형태에 선행하는 마띠에르로의 회귀는 결국 미술사적 퇴행을 의미하며, 따라서 마띠에르의 활용이야말로 反아카데미즘을 현상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9)

박수근의 마띠에르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서, 서구 미술가들이 관습화된 회화의 전통을 원시미술의 생명력으로 극복하려 했다면, 박수근은 새로운 제안없이 그저 답습되기만 하는 서양문화를 한국적인 마띠에르의 도입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그 스스로 美石이란 아호를 가지고 있으면서 화강암 조각을 늘 곁에 두고 그 질감을 재현하려 노력했던 박수근은10) 기름기가 제거된 유화물감을 오랜 시간을 두고 거듭해서 바름으로써, 회화적 재현의 공간을 넘어 물질적 현존의 공간을 구축해냈다.

박수근은 당시 주한 외교관의 부인으로 있으면서 그의 작품을 틈틈이 구입해주었던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er)여사가 귀국한 이후에도 그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는 일에 도움을 주자, 감사의 편지와 함께 그림의 판매대금으로 작업에 소요되는 물감 (주로 흰색 Blanc de Zinc)을 사서 우송해달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쓴 바 있다. 그 가운데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작기법에 관한 노트를 밀러 여사가 1965년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화가 박수근>이란 글을 쓰면서 인용한 바가 있어 박수근의 두꺼운 회구층에 대한 의문을 작가 스스로의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나는 그림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번 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 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드는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검은 윤곽선을 이용한 대담한 필법으로 주제를 스케치한다."11)

그간 발간된 전시 카탈로그나 자료집에 의하면 대부분'캔버스 위의 유채' 또는 '하드보드 위의 유채' 로 기록된 박수근의 그림재료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정리되었다. 특이한 점은 많은 수의 유화가 종이나 펄프를 두껍게 겹쳐 만든 종이보드, 또는 건축자재로 흔히 쓰이는 메소나이트(톱밥을 압축해서 만든 판지)를 사용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간혹 캔버스를 쓴 경우, 프레임에 Fukuoka라는 고무인이 찍힌 것으로 보아 늘 작은 그림 한 점을 팔아 쌀을 사야했던 가난한 화가에게 당시에는 고가였을 일제 캔버스를 구입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작은 판지들은 이젤이 아니라 바닥에 놓인 채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백내장으로 인한 왼쪽 눈의 실명이 비단 과음에서 연유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구축된 소박하면서도 푸근한 화면의 느낌은 인간 박수근의 심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동시에 분청사기나 질그릇의 투박함, 가장 한국적인 자재인 화강암의 석물과 풍화작용을 거쳐 노년기에 접어든 우리 나라의 대지를 연상시킨다. 박수근을 가리켜 '서민 화가', '민족 화가' 라 일컫는 까닭은 그가 포착한 그림의 내용적인 측면 뿐만이 아니라 이렇듯 한국적인 미감을 가장 생생히 드러낼 줄 알았던 창조적 조형의 혜안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사실을 진리로서 입증한 박수근의 진가를 새삼 확인한다.


주)
1) 이지미, "박수근 작품의 이미지 해석" 석사학위 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1996, pp.8-9 참조.
2) 김영나, "밀레의 농민상-미국과 동아시아에서의 수용현상"「미술사논단」제 6호 (서울:한국미술연구소), pp.81-111.
3) 1920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화가 金瓚永의 글. 앞글 p.103에서 재인용.
4) 김복순, "나의 남편 박수근"「자료로 본 우리의 화가 박수근」(서울:시공사, 1995), P.53.
5) 김현숙, "소외의 미학-박수근 작품세계의 기조"「한국근대미술사학」제 3집 (청년사, 1996), p.55.
6) 권원순,「추상과 감정이입」(대구:계명대학교출판부, 1982), pp.25-27참조.
7) 황유엽, 장리석, "평양시절의 박수근"「자료로 본 우리의 화가 박수근」(서울:시공사, 1995), p.172.
8) 레비 스트로스,「야생의 사고」, 안정남 역 (서울:한길사, 1996)
9) Herbert Damisch,"Entree en Matiere" Jean Dubuffet (St. Paul de Vence:Fondation Maeght, 1985), p.33.
10) 윤범모, "박수근의 예술세계와 민족미의 구현" 한국근대미술사학」제 3집 (청년사, 1996), pp.15-17 참조.
11) Margaret Miller, "Pak Soo Keun:Artist i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잡지명 미상), February, 1965,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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