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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같은 소박(素朴)한 심성(心性)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2-01-27 17:18:33 조회수 351
평론가 이경성

흔히 말하기를 예술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예술은 그것을 창조한 작가의 인간성의 구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같은 가장 고전적인 예술과 인간성과의 관계의 해석은 현대예술의 풍조속에서 그 권위가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화가 박수근의 경우는 이 고전적인 해석이 그대로 의미를 지닌 채 그를 이해하는 좋은 열쇠가 된다. 그만큼 그는 허식없는 적나라한 인간성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예술을 형성해 갔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유명무명의 천 명에 가까운 현역 미술가들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인간다운 솔직함을 작품에 드러내고 가장 한국적 풍토성을 지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하면서도 맑은 풍토시에 젖게 하는 화가는 박수근이 으뜸일 것이다.

화가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서 박형지와 윤복주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교교육은 양구공립보통학교만을 마치고 가사를 돌보는 신세가 되었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도 그의 가장 큰 기쁨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지도는 안 받았지만 그가 보고 느낀 세계상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소년시절의 그의 그림은 대상의 객관적 진실을 충실히 묘사하려는 의도와 그 사실에 못 미치는 기교의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지런히 화집이나 전람회 같은 것을 보고 순전히 눈썰미로 시각의 훈련과 표현의 비밀을 습득했다.

이같은 남 모르는 노력이 결실되어 그가 작가로서 최초의 이름을 올린 것이 1932년 제 11회 [선전(鮮展)]이었다. 이 때 출품한 작품은 <봄>이라는 것으로 한국의 봄을 소박한 시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 후 1936년 제 15회 [선전]에는 <일하는 여인>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이것은 어느 중년여인이 등에다 어린아이를 업고 절구를 찧고 있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 주제, 즉 한국 서민들의 생활풍경을 그린 주제는 그의 향토의식의 발현과 아울러 그의 작품의 특징이 되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18세기의 화가 샤르댕이 지니고 있던 서민성이나 청교도적인 마음씨 같은 것을,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과 양식이지만 우리의 화가 박수근이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나중에 그의 향토성의 대목에서 이야기하겠다.

1937년 제 16회 [선전]에도 <봄>을 출품하였는데, 박수근은 이 때 생활의 근거지를 서울로 옮기었다. 그 후 1938년 제 17회 [선전]에는 <농가의 여인>, 1939년 제 18회 [선전]에는 <여일(麗日)>등을 출품하였다. 한결같은 주제지만 그 속에 민족의 풍채가 아로 새겨지고 해를 거듭할수록 순화되었으나 일인(日人)심사원이나 일인화(日人化)되는 한국화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입선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1939년에는 서울에서 고향인 강원도로 이사를 갔다. 그러다가 다음해인 1940년에 평양으로 이사가서 그곳에서 제 19회 [선전]에 <맷돌가는 여인>을 출품하였다. 이것은 사실적인 눈으로 대상을 크게 잡아 필치를 약간 거칠게 처리한 작품이다. 그후 제 20회, 제 21회, 제 22회 [선전]까지 줄곧 평양에 살면서 같은 한국의 농부나 주부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하였다.

이같은 좋은 바탕과 체질의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8.15광복 후에 화단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온순하고 겸양에 가득 찬 그의 인품 때문이었다. 그는 남이 자기를 발견하거나 인정할 때까지는 결코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가치와 빛을 지니고 있으나 스스로 발광하는 것이 아니고 남의 조광으로 그의 빛을 나타내는 보석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그가 광복 후 화단에서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3년 제 2회 [국전(國展)]과 1955년 제 7회 [대한미협전(大韓美協展)]에서였다. 그의 화단적 활약의 발자취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3년 제 2회 [국전]에는 <집>, <노상에서> 2점을 출품하여 <집>이 특선을 했다. 1954년 제 3회 [국전]에는 <풍경>, <절구>, 1955년 제 4회 [국전]에는 <오후>, 1956년 제 5회 [국전]에는 <풍경>등을 출품하여 입선 및 특선을 하였는데 [국전]출품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1959년 제 8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2년 제 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보다 앞서 1955년 제 7회 [대한미협전]에서는 <두 여인>, <노상>, <산> 3점을 출품하여 <두 여인>이 국회문공위원장상을 받았다.

1958년 3월에는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World House Galleries) 주최의 [한국 현대 회화전]에 <모자(母子)>, <읍내거리>, <풍경> 3점을 초대 출품한 바 있다.

1959년 4월 제 3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조선일보 주최)에 초대되어 <봄>, <휴녀(休女)>, <노인과 유동(遊動)> 4점을 출품하였다. 1959년 제 8회 [국전]에서 추천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앞서 말했거니와 이 때 그는 <휴일>, <좌녀(坐女)> 2점을 출품하였다.

1961년 일본 [국제자유미술전]에 초대출품하였다.

1962년 제 11회 [국전] 심사위원이 되는 동시에 마닐라 국제전에 초대출품하는 등 국내 국제적 양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국내의 화랑에서는 한국적인 그림을 찾는 외국인 미술애호가들에 의해 많은 작품이 해외로 나갔다. 그래서 그의 가치를 아는 한국인을 제외하고는 그의 작품은 오히려 외국인 사이에서 유명했다.

천성이 우직한 강원도 태생의 그는 남처럼 약게도 살 수 없었고 그렇다고 남에게 아첨하고도 살 수 없었다. 더구나 그림에 바친 그의 정렬과 작가로서의 자세를 견지하기 위하여 남처럼 월급생활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좋거나 싫거나 그림을 그려 생활을 하고 그 자유로운 생활 속에서 그림만을 그렸다. 따라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그의 작품은 소품이었고 팔기 위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목적이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그림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이 작품의 예술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말하는 것은 주제의 향토성이고 다음이 소박성이다. 주제의 향토성이라는 것은 그의 인간적 체질에서 우러나오는 체취가 한국의 풍미를 지닌 채 그의 가장 순도 높은 시정(詩情)을 조형적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32년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 이래 줄곧 같은 주제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농가의 여인>, <봄>, <일하는 여인>, <휴식>, <노상에서> 등은 근 30여 년을 두고 되풀이하고 있는 주제였다. 어린이를 업고 일하는 서민층의 여인이나 노상에 쭈그리고 앉은 노인이나 일에 지쳐 휴식하고 있는 노파의 모습이 그의 그림 주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의 시각은 늘 새롭고 그의 화면은 생명이 넘쳐 흐르고 있다.

그것은 화가 박수근의 깊은 애정이 주제에 이입되고 거기에서 큰 공감이 메아리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률적이고 진부하게 되기 쉬운 향토주제를 들고 나오면서도 그것을 안가(安價)의 지방취미로 타락시키지 않고 맑고 높은 민족의 서정시로 지양시킨 것은 화가 박수근의 역량의 소치이다. 역량이라기보다 허식없은 그의 인간성의 발현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의 작품의 소박성은 그가 아무리 오래도록 그림을 그려도 그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라는 생리와 체질의 문제에서 우러나온 결과이다. 기술이나 기교에 병들지 않은 원시적인 건강이 그의 작품에 있다. 이같은 작가는 노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시대나 환경이 자연스럽게 소유하고 있는 종류의 화가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20세기 프랑스의 화가 앙리 루소이다. 그들 소박한 화가들이 지니고 있는 천진성과 서민성, 그리고 원시적 건강성은 화가 박수근의 경우에도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직하다. 그러나 그 우직은 영원한 진리에 잇닿는 바로 그것이다. 하나도 세련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모든 표정의 원리 그 자체이다. 구수하고 거추장스럽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그이지만 그에게는 지혜가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건강성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특질은 그의 기법과 재료사용법에서 드러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기법은 화면을 두껍게 바르고 이른바 빠토의 층(層)을 형성하는 일이다. 작업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의 마티에르는 두께를 더해가고 색층은 빛을 더해간다. 그것은 루오가 화면의 구축으로 미의 생리를 논리적으로 정착한 것처럼 박수근도 그의 인생을 색의 층에다 추가해 갔다. 이 박수근 작품의 층위는 그가 인생에서 체험한 미의 미의식의 인간적 양심이 침전되어 가라앉은 그러한 심층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회색을 주조로 하는 이 색층이 박수근 예술의 표정이며 그의 우직성과 더불어 미의 건강성을 빛내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에 싫증이 나는 연대에서 그의 작품의 가치와 빛만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시간 속에서 살면서도 시간을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 5월 6일 "천당길은 가까운 줄 알았더니 왜 이다지도 먼가"라는 말을 남기고 천사같은 미소를 그의 처에게 던지고 자는 듯이 숨지어 간 독실한 크리스찬인 이 화가의 죽음은 빈곤과 중심상실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화단의 일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51세라는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그가 남긴 수 백점의 작품들(대부분 소품)은 이 겨례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 것이다.

1970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현대화랑에서는 박수근유작소품전이 마련되었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은 유화 <농악>(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군상>, <조춘(早春)> 기타 2점과 미완성 작품 2점, 그리고 수채화 및 연필 데상이 200여 점이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비교적 소품이라서 그가 살아 생전 그리 비싸지 않은 값으로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고 나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거의 남의 손에 있었다. 그 중에도 미국인 수장가에 의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적잖이 많았다.

이 소품전을 통하여 볼 수 있는 박수근 예술의 편모는 그가 형태화가로 얼만큼이나 조형의 기초가 되는 형태에 대하여 신경을 썼느냐하는 것이다.

일찌기 우리는 박수근 작품의 전체적 인상으로 보아 그를 형태화가라고는 보지 않았다. 회색을 주조로 하고 백색, 흑색 그리고 간간이 사용한 청록색 등은 우수에 찬 그의 조형공간에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연필 데상을 보고 나서 그는 누구보다도 조형의 구조를 중요시하는 형태화가라는 것을 사실로서 느꼈다. 그가 불과 몇몇 안되는 소품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소묘를 이 구조적인 노력에 바치었는지 모르겠다. 가령, 그가 즐겨 그린 인간군상도 거리에 앉거나 걸어가는 수많은 한국인의 관찰과 소묘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 굳건한 구조 위에다 그는 그의 세련되고 가라앉은 색채를 하나하나 더해 갔던 것이다. 그 대상과 주제에 대한 이와 같은 확고한 자신이 있기에 그의 작품을 안심하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유작은 분산된 채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다. 그러기에 박수근 예술의 결집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그의 유작을 한 곳에 모아 보고 또 그의 화집을 내는 일이다. 그래야만 이 한국의 근대가 갖고 있는 불세출 소박 화가의 진가가 영원화되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미술가 논고] (1974. 一志社). pp. 157-164. 전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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