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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2-01-27 17:19:13 조회수 349
평론가 김병종

박수근

메마르고 뒤틀린 나목들 사이의 인생 행로를 숙명처럼 걸어간 한국의 밀레.

그의 풍경화 속의 선한 이웃들은 바로 박수근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쓰라린 세월의 고통과 신음소리까지도 화강암 질감 같은 화폭 속으로 가라앉혀서 따뜻한 긍정과 선의의 세계를 열었던 미의 순교자였다.

191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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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과 양구

화실이 신림동 '난곡(蘭谷)'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난초 향기 그윽한 골짜기라는 이름과는 달리 올망졸망 고달픈 서민들의 삶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밤늦게 자장면 배달을 시킨 적이 있는데 한밤중 달랑 자장면 한 그릇을 듥고 육교를 건너온 청년에게 참 미안했다.

"미안하긴요. 장산걸요."

"그래도 한밤중에..." 했더니 불쑥 "정 그러시면 저 그림이나 하나 줘요" 했다.

"그림?" 나는 애매하게 웃고 말았는데 며칠 후 점심에 다시 배달을 온 그 청년이 "아씨(아저씨), 그림 언제 주실 거예요?" 했다.

"무슨 그림?" 했더니 "에이, 딴청 피우지 마세요. 저거 주시기로 했잖아요" 한다. 닭 두 마리가 서로 노려보고 있는 '투계' 연작 중의 하나였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후배가 정색을 하며 "세상에, 저거 얼마짜린 줄 알기나 하나?" 고 물었다.

"얼마게요?" 청년이 빤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수백만 원짜리야." 후배가 말했지만 그는 피식 웃었다.

"뻥까지 마요. 주기 싫으니까... 어느 미친 것들이 저런 걸 그런 돈 주고 사요. 웃기는 짬뽕들이야."

그는 중국집 배잘 청년답게 음식 이름을 넣어 야유했다.

"생각해봐요. 저 시커먼 닭, 저거 진짜 닭이라 해도 몇 푼 가겠어요. 종이에 먹물로 찍찍 그린 걸 가지고... 가만, 저거 오골계예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자장면과 그림」이라는 글로 쓴 적도 있었지만 박수근의 고향 양구에 와서 다시 그 기억이 떠올랐다. 들리는 소문에 양구에 머잖아 '박수근 기념관'이 설 거라 했지만 정작 양구땅에는 박수근의 스케치 하나 남아 있지 않다. 화가는 평생 고향과 서민들의 삶을 그려왔건만 정작 서민들은 그 그림을 만지기조차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양구에 박수근의 그림은 없어도 그림 속의 풍경만은 여전했다. '선사박물관'이 있는 이곳은 첩첩산중에 에워싸여 육지 속의 섬처럼 대처(大處)와 격리되어 있지만 그만큼 자연이나 인성(人性)의 오염도가 덜했다.

박수근은 일찌기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에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했지만 실제로 양구는 파로호 상류에 아직도 '고인돌', '선돌' 등 선사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돌의 고장이기도 하다. 기름기 없는 무채색의 가난한 들길을 걸어 정림리 산마루터 생가터에 이르는 동안 산천과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선(善)함투성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을 그려야 한다"는 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박수근의 그림에 왜 악(惡)은 위악(僞惡)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근ㅇ는 조용하고 참했어. 남하고 싸우는 일이 없었지. 사람들이 낭중에 목사될 애라고 했으니까." 정림링서 옆집에 살며 함께 서당을 다녔다는 김유만 할아버지(88)의 증언이다.

아닌게 아니라 사진만으로도 박수근에게서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나 개신교 목사 같은 성직자의 느낌이 난다. 열두 살 때 처음 책에서 밀레의 '만종'을 보고서는 "하나님, 저도 이런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그.

실제로 그는 광야의 선지자처럼 고달픈 예술가의 길을 걸어갔다. 가난과 전란 속에서 양구, 춘천, 평양, 군산 그리고 서울의 창신동과 전농동 일대를 떠돌며 때로는 도청 서기로, 미군부대 초상화가로, 심지어 부두노동자로 전전하면서 죽기까지 손에서 화필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는 박수근으로 짐작되는 한 미군부대 초상화가의 이야기가 나와 세간의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김유만 할아버지의 증언.

"수근이는 낭구(나무)에 지름(기름)먹인 분판에다 그림을 그렸어. 조이(종이)가 원체 귀하던 때였으니께. 하루종일 분판에 먹으로 그린 다음 지우고 또 지우고 했제. 창호지라도 몇 장 얻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는데..."

이 부분에서 미술학교 훈장일을 20여 년 가까이 한 나는 혼란스러웠다. 미술은 과연 가르치거나 배워서 될 일인가 하고. 박수근은 미술학교 문 앞에도 가지 않았건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외제 화구를 지천으로 쓰고 파리와 뉴욕을 들락거려도 제대로 되지 않건만 그는 분판에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익혀 하나의 세계를 열었던 것 아닌가.

비록 분판에 그림을 그릴 때뿐만이 아니라 가난은 평생 그의 벗이었다. 그 가난 속에서 가족은 자주 흩어져 살아야 했고, 그대를 가지고 출품한 관전(官展)에 낙방하기도 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는가 하면 화가에게는 생명 같은 눈에 병이 생겨 한 눈이 실명되기까지 한다.

창신동에 살 때였다. 왼쪽눈이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아 안과에 다니고 계셨는데도 점점 시력이 나빠져 결국은 백내장이 되어 눈동자에 흰 막이 점점 가로막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수술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수술비가 마련이 안 되어 그림이 팔릴 때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저녁이 되어도 안 들어 오셔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신예용(申禮容) 안과병원에서 전화가 왔다고 이웃 창신 한의원에서 전해주어 그 안과에 가보니 눈수술을 하고 누워 계셨다. 의사가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병원에서 간호를 했다. 집에 알리면 걱정을 할까봐 혼자 와서 수술을 하셨다고 하신다. 일주일 입원했다 퇴원하여 집에서 매일 치료받으러 다니셨는데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늘 고통이 심했다. 그래서 다시 최장수 안과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안압이 높아 고칠 수 없으니 아픈 눈의 신경을 끊어 통증이나 없이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시 수술을 하여 신경을 끊어 통증은 없이 하였으나 한쪽 눈은 아주 실명을 하여 한 눈으로밖에 보실 수 없었다. 그 한 눈을 가지고 매일 그림을 그리셨다.

- 「나의 남편 박수근」중에서

그의 아내가 회상한 실명 전후의 형편을 쓴 글의 일부다. 한 눈의 실명뿐이 아니다. 화가의 아내의 회상은 전란 속에서 일가가 당한 고통 또한 생생하게 전해준다.

전쟁은 치열해져서 유엔군이 동원된 후로는 매일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시골로 피난 가는 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교인이며 요실찰 인물 명단에 오른 우리로서는 필경 저네들이 불리하게 될 때 우리들의 운명이 어떠한 지경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의논 끝에 우리도 이 기회를 틈타 '피난'이라는 명목으로 저네들의 마수를 피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몇 십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했다... 그이는 낮에는 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내려와 주무셨는데 용케도 그이가 있는 시각에 찾아온 것이다. 문을 열라는 그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런 경황 속에서도 먼저 남편을 빼돌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끌려고 "누구세요. 누구세요. 옷을 입고 문을 열게요."하면서 뒤쪽 방문으로 그이를 내보낸 후 침착하게 문을 열었다. 따발총을 맨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남편을 내놓으라고 야단이다.

"남편은 원산으로 가고 나만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 있어요." 라고 둘러대니까 그들은 막무가내로 남편을 내놓으라는 요구만 되풀이한다. 모든 정보를 다 입수하고 왔으니 명령을 거역할 경우 너를 대신 죽이겠노라고 하면서 총부리를 내 가슴에 들이댄다. 그이 대신 내무서로 연행되어간 나는 이틀 동안이나 그들의 온갖 고문을 받으며 수모를 견뎌야 했다. 두 살짜리 아이(남편의 월남 후 이북에서 죽은 성인(成仁))를 품에 안은 채. 그이는 산에 외정때 징용을 피하려고 누가 만들어놓은 무덤같이 생긴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며칠을 버티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매일매일 밥을 날라다 드렸다. 그러던 어느날 금성에 다녀온 동리 아주머니 한 분이 숨가쁘게 뛰어오면서 읍에 남쪽 국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분간 못할 몽롱한 기분으로 산으로 달려가 그이에게도 들은 소식을 전했다. "이제 살았다!" 그이의 신음소리에 가까운 탄성, 그리고 내 손을 잡은 그이와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러운, 너무나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 「나의 남편 박수근」중에서

그가 그린 앙상하게 메마르고 뒤틀린 나목(裸木)들이야말로 이런 쓰라린 세월의 내면 풍경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풍경화 속의 인생행로를 숙명처럼 걸어가는 촌부(村夫)며 노인들은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자 이웃들의 모습인 것이다. 거기에는 삶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세월이 있고 인고(忍苦)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통과 고뇌 그리고 신음소리도 모두 가라앉혀서 오히려 아름다움이 되게 하고 만 것이다. 원망과 갈등, 미움과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긍정과 선의(善意)의 세계를 이룬 것이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리 쫓기고 저리 내몰리며, 게다가 경제적 궁핍과 육신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그는 연금술사같이 그같은 미의 세계를 열 수 있었던 것일까.

화강암 질감 같은 풍경 속을 걸어 언덕배기에 있는 '박수근 화백 기념공원'에 오른다. 작은 군도(軍都)인 양구에 한 화가의 기념공원이 있다는 것은 눈물 나게 반가운 일이다. 이 산골짝 속에 그의 동상과 기념공원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반가움이 더했다.

읍내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의 동상 옆에는 오래된 석조건물의 교회당이 서 있다. 석양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 녹슨 종탑의 교회당 가까이에 오르니 천국이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다. 문득 그가 아름다움으로써 하늘의 뜻을 전한 미의 전도사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인물화에는 금빛 광배(光背)도 찬란한 의상도 없이 오히려 메마르고 가난한 모습들이지만 그래서 더 천국의 아름다움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그러나 척박한 세월을 만나 그림으로 선종(善終)한 박수근은 고달픈 생애를 접으며 이렇게 말했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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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朴壽根

서양화가. 강원도 양구 출생.

양구보통학교 졸업 후 가사를 돌보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 화강암 표면과도 같은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에 명암과 원금감을 배제하고 형태를 단순화시킨 작품들을 그렸다.

일정한 직업없이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가다가 백내장을 앓아 한 눈을 실명하는 등 가난과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다 타계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가장 독창적이고 한국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고향 양구군에서는 박수근 화백 선양 사업 및 기념사업계획을 세우고, 기념관 설립 및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양구 읍내에 그의 기념공원이 있고 경기도 포천군 동신교회 묘원 내에 묘지와 묘화비(墓畵碑)가 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2000, 효형출판) pp. 26-37. 전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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