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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남정네의 상징, 나목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2-01-27 17:22:06 조회수 921
평론가 이 주 헌

박수근<나무와여인>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어릴 때 무척 즐겨 불렀던 동요 ‘겨울 나무’. 다소 처량맞은 느낌 없지 않으나 분위기가 무 그럴듯해 좋아하던 노래이다. 커서는 별로 부르거나 들을 기회가 없는 노래지만 간혹 아이들 자장가로 흥얼거릴라치면 어느덧 이 곡은 나에게 따뜻한 사부곡(思父曲)이 되고 만다. 박수근의 그리 탓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남자, 그 가운데서도 청장년층의 가장쯤 될 법한 남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이라고는 아낙네와 어린이, 노인이 대부분이다. 박수근의 그림이 주로 민초들이 그의 앵글에서 비껴나 있다는 것은 사실 매우 이채로운 부분이다. 남정제의 부재, 거기에 ‘박수근 풍속화’와 남다른 특징이 있는 것이다.

남정네의 부재와 함께 눈여겨볼 박수근 회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나목의 존재를 꼽을 수 있다. 나목은 박수근 그림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매우 친숙한 소재다. 그것은 동네 어귀나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하릴없이 굽어보는 무심하고도 정적인 존재다.

나목은 죽은 나무 아니면 겨울 나무다. 잎이 달려 있질 않으나 오로지 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나무가 나목이라는 사실은 그의 그림 속 계절이 늘 겨울에 가깝다는 말과 같다. 그만큼 을씨년스럽다. 등장 인물들의 생활 풍정과 늘 함께 하는 이 친숙하면서도 추운 존재는 그러므로 다른 인물 못지않게 스스로의 존재 이유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표상하는 존재일까? 내가 보기에는 바로 사라진 남정네, 가장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내가 박수근의 나목을 사라진 남정네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그들은 대부분 기둥처럼 주어진 공간 전체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무심히 서 있는 듯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안위에 늘 신경 쓴다. 등장 인불과 조화하려 애쓰는 그들의 몸동작이 이를 잘 말해준다. 게다가 나무 주변에 모인 인물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아이를 보거나 행상을 나서는 여인들이 거기에 있다. 1962년 작 <나무와 두 여인>은 이 같은 소재의 대표작이다. 나목 주위에 아낙네들이 모여 휴식을 취할 때면 삶의 의지처로서 나무의 특징은 어둑 명료히 살아 오른다. 나목은 그 수동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안의 가장인 것이다.

그런데 가장들은 왜 이렇게 자신을 본 모습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삭막한 나목이 됐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실존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리 근대사 속의 가장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해방, 한국전쟁, 뒤이은 분단과 경제개발 등 숨가쁜 격변의 최전선을 살아야만 했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음에도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집안 대문도 제대로 못 지켰을 뿐 아니라 서로 피흘리며 사워야 했다. <나무와 두 여인>에서 보듯 자연히 가사와 집안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활동은 모두 여자들의 몫이 됐다. 20세기 한국 여인네들이 각 분야의 국제 경쟁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무너져 내리는 가부장제 사회를 끝까지 버티고 지켜온 그들만의 남다른 잠재력 덕이었다. 그에 반해 가장들은 더욱 참담하고 부끄러운 자신들의 모습을 그들의 빈자리를 통해 확인해야 했다. 사랑방이 없어진 뒤 가장을 위한 아무 대안도 없는 오늘날의 주거 구조가 생활?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잇다. 그들은 아폴로에게 쫓기던 다프네가 월계수가 되듯 그저 그 자리에서 벌거벗은 나무가 되기를 원했다. 상처받고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어떤 열매도 이파리도 달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박수근에게도 마찬가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의 나목 그림은 다시 그의 자화상이 된다. 굳이 박수근이 아니더라도 그 시절 그 자화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한국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됐을까? 내가 나의 아버지를 그의 그림에서 발견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겨울날 외투 가득히 추위를 담아오시던 아버지. 내 아이의 자장가로 나도 모르게 ‘겨울나무’를 부르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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