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화가 朴壽根(1914∼1965)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근의 작품에서 1950 . 60년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느낀다고 한다. 또한 작품의 두터운 마띠에르가 마치 화감암에 아로새긴 마애불과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박수근 작품의 특징은 평생을 빈곤하게 살았던 그의 생애와 부합되는 것이어서, 박수근은 사후에 가장 서민적이고 한국적인 화가라는 賞讚을 받게 되었다.
박수근은 나무와 아주머니, 아기 업은 소녀, 시장과 도시의 변두리풍경, 노인, 판자집 등을 즐겨 그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은 과장되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함과 경건함마저 자아내게 한다. 박수근이 전형적인 서민상을 그린 '서민의 화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이러하다. 특히 거리와 나무는 박수근에게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나무는 1953년에 그린 <귀로>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유화작품 43점과 수채화 작품 3점이 현재 알려져 있다. 이는 상당히 많은 분량인 것이다.
박수근이 나무에 애착을 가졌던 이유는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 못하다. 그의 고향이 강원도 양구 시골이었다는 점이 지적될 정도이다. 박수근의 작품에서 나무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연구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화면에 적절한 변화를 주고, 한국현대사의 격변기에 휩쓸려간 家父長의 상징, 고달픈 서민의 초상 정도로 해석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박수근의 작품에서 나무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개인사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민중의 삶에 대한 리얼리티를 가장 한국적인 조형언어로 표현한 20세기 최대의 화가라는 그에 대한 평가에 답할 수 없다. 더욱이 박수근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4.19와 5.16이라는 한국현대사의 격변기이었다. 이는 박수근의 회화세계에 대한 평가가 작품의 소재와 양식에 의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해준다. 당대 서민의 삶에 대한 전형이 시대와 동떨어져서 논의될 수 없는 까닭이다.
2. 도시 변두리 거리와 나무
박수근은 1914년에 강원도 양구군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는데, 아마도 감리교 계통으로 생각된다. 그는 고향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21세 때에 춘천으로 옮겼는데, 이는 집안의 파산 때문이었다. 박수근의 도시생활의 시작이었다. 즉, 해방 이후 6 . 25 전쟁까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한 5년을 제외하고는 그의 삶은 도시에서 이루어졌고, 그 가운데 대부분이 서울생활이었다. 그가 도시의 변두리 풍경을 즐겨 그렸던 것은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1952년 무렵부터 박수근의 서울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듬해부터 미8군PX에서 관광용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창신동 그의 집은 이때의 수입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평생의 후원자이던 밀러부인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도 이곳이었다. 박수근은 53년 제 2회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국전)에서 <우물가(집)>이 특선, <노상>이 입선하였고, 제 3회국전에서도 <풍경>과 절구>가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듯 그는 수입원이던 초상화 제작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섰다.
나무가 박수근의 작품소재로 등장한 것은 이 무렵부터이었다. 당시 서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시민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야만 했다. 20대 초반까지 고향 양구에서 보낸 시골청년 박수근에게 서울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의 대부분은 도시의 변두리 길가에 서 있었다. 아마도 미8군 PX와 반도호텔을 매일같이 오가는 길에서 보았던 나무들이었을 것이다.
박수근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다름없이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또한 낯선 객지생활을 하던 그에게 나무는 고향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존재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나무들은 서로 모여 숲을 이루지 않았다. 오히려 한 그루만 그려지거나, 많아야 서너 그루를 넘지 않았다. 박수근의 나무들은 한 그루, 한 그루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는 전후 서울의 스산한 분위기로 이해할 수도 있고, 객지인 서울에 서 뿌리를 내리고자 노력하는 박수근의 자화상으로 볼 수도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는 마을 어귀에 흔히 보이는 그런 나무이다. 그 형태도 고목에서 잘리고 구부러진 나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잎이 무성한 나무는 찾기가 어렵다. 그리고 나무의 생태나 여러 모습을 표현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화면구성에 변화를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 결과 정적이고 단순한 소재에 리듬과 구성의 묘를 더해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박수근의 나무에는 명암이나 색채가 절제되어 있다. 푸석하고 기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림자 같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즉, 거기 있어도, 혹은 없다해도 그 누구하나 의식하지 않는 그런 나무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좌.우익의 분열, 전쟁의 상처에서 전통적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약화되어갔다. 박수근의 가계도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하여 산산조각이 났으며, 그 자신 또한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하여야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갖는 존재가 무의미할 수는 없었다. 이는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에서 잘 나타나있다. 그림자가 어떠한 현실적인 힘도 갖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자 없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이치인 것이다.
3. 나무와 여인
박수근의 작품에서 여인은 비교적 초기작부터 등장하였다. 1930년대의 그의 작품들은 비교적 주변 삶의 모습을 주제로 하여 그려졌다. 「봄」, 「일하는 여인」등이 그것인데, 주로 여인과 노동이라는 주제를 사실적인 표현방법으로 제작하였던 것이다. 1950년대 이후 여인들은 박수근의 작품에서 종종 나무와 함께 그려졌다. 여인들은 나무를 의식하지 않은 듯 무심히 머리에 함지를 이고 지나가기도 하고, 나무 주위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나무와 여인 혹은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동격으로 다루어졌다. 즉 나무가 배경이 아닌 등장하는 인물과 같은 무게로 다뤄지고 있으며, 나무가 중심 소재가 되고 인물이 뒷배경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인물의 자세나 등장 인물도 거의 변화가 없으며 오히려 나무의 다양한 형태와 배치 방법을 통해서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다. 거기에다 배경은 거의 생략되어서 원근감도 무시되고 있으며, 동일한 주제를 이렇게 저렇게 그려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든다. 심지어 1950 . 60년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상은 노동하는 사람이 아닌 정물로서의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도시 변두리 소시민의 일상이 엿보인다. 판자집과 골목,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는 노인, 빨래를 하거나 노상에서 좌판을 벌리고 있는 아낙네, 아이를 업고 부모를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 등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외된 계층이었다. 그러나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삶에 대한 고통의 흔적이 치열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시골 아낙네와 노인 . 아이가 그려져 있지만, 그들의 삶은 그림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박수근이 서민들의 삶을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회화적 표현을 위한 소재로써 인물들을 취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일게 한다.
그는 1959년 3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장업계>라는 화장품 잡지에 삽화를 연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양산 쓴 두 여인>(1959년 5.6월호) < 나무와 두 여인>(1960년 3월호)등 여인을 그린 삽화도 상당 수 있었다. 그런데, 삽화는 간결한 선묘를 가지고 주제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배경묘사가 중요한 분야는 아니었다. 실제로 박수근은 자신의 삽화를 정성껏 오려서 대학노트에 정리해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많은 컷이, 유화로 다시 그려지곤 하였다. 박수근의 작품에서 유사한 형태의 인물과 나무가 타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사정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4. 맺음말
박수근에 대한 작가상은 <서민의 화가>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동시대 서민들의 전형을 예술적으로 포착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는 의미이다. 예술의 전형성에 대한 골치 아픈 논의가 있지만, 대체로 이 말은 한 시대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박수근의 경우에는 그가 서민 삶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표현하였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 있겠다.
박수근이 살았던 시기는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였다. 그가 태어나던 1914년은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맞서 서간도와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박수근은 1932년부터 43년까지 매해 선전에 출품하여 이 가운데 9회에 걸쳐 입선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끝내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민족은 견디기 힘든 굴욕과 고통을 강요받았다. 오지호 등의 청년화가들이 선전을 거부하였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박수근의 선전 입선은 그렇게 큰 문제를 삼지 않는 듯 하다.
(전략) 22세 되는 1936년에는 <일하는 여인>을 출품하여 선전에 입선하게 됩니다. 나는 그때 청년 박수근의 기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 신인들에게 공모전이 갖는 긍정적인 면이라 자기 검증의 기회이고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죠(하략)
그 이유는 이러하다.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한 박수근에게 일본유학출신 화가와 함께 반선전파와 선전파로 구분하여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선전이 신인작가의 공모전의 성격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전이 민족문화책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박수근은 1932년이래 43년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선전에 응모하였고, 아홉 번을 입선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후 박수근의 회화세계가 얼마나 선전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는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1950 . 60년대는 전쟁의 상처와 4.19혁명, 그리고 5.16군사쿠데타가 거듭되던 격변기였다. 박수근은 이 잔혹한 시절을 살아야만 했던 서민의 리얼리티를 가장 잘 포착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혹자에 따라서는 그의 작품에서 기독교의 聖畵를 떠올리기도 하교, 한편에서는 화강암에 새긴 마애불을 연상하기도 한다. 분명, 박수근의 작품에는 차분하고, 소리 없이 인간의 향수를 적시는 따듯함이 깃 들어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서민의 삶을 박수근의 그림을 통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박수근의 그림이 당시 서민 삶의 전형을 포착한 리얼리즘이 아닌, 밀레식의 관조에 가깝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어려서부터 그림솜씨가 남달랐다. 그는 12살 때에 밀레의 <만종>이 실린 원색도판을 보았는데, 이후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고 매일 기도를 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만종에서 노동을 마치고 난 부부가 노을과 함께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하는 모습은 소년 박수근에게 경건함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박수근의 작품에서 나무는 대지에 가장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면서도 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서 하늘에 닿는 존재이었다. 또한 변함없이 시대를 관통하는 생명력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전통사회에서 나무는 神樹로서 신성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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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 담양수북중학교 미술교사 이혜숙님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