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의 화가라는 박수근의 인간성
나는 생전의 박수근 선생을 뵈온 적이 없다. 뵈올 처지도 아니었고 나이도 아니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1965년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으니까.
그래서 나에게 박수근이라는 화가는 현대미술사에 나타난 역사상의 인물일 따름이며 나의 박수근론이란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미술사적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인 거리를 갖는 작가상이란 왕왕 그의 인간적 실체들이, 마치 박수근의 작품에 나오는 나목(裸木)처럼 곁가지가 모두 쳐지고 오롯하게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곤 하는데 그것은 한 인간이 죽은 다음 역사상의 인물로 영원히 남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에게 던져진 박수근이라는 작가상은 ‘서민의 화가’이다. 박수근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전형적인 서민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작가상 역시 ‘서민의 화가’이다. 이는 박수근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는 오직 박수근 한 분만의 작가상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박수근의 사진은 만년에 안경을 쓰고 기품 있게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으로 모든 도록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이것은 박수근의 이미지를 마치 예술원 회원이나 대학 총장님 같은 분위기로 잡아내어 도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고인에게 결레인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창신동 집 마루에서 아내와 막내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가장 박수근다운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소매 내의에 양말을 벗고 손가락 깍지ㄴ를 끼어 양무릎을 껴안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천연스런 자세와 어진 눈빛이 이 사진 뒷 배경이 된 그의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흔연히 어울린다. 게다가 새로 산 흰 고무신이 마루 위에 잘 모셔져 있어 이 가난한 화가의 맑은 마음씨를 보는 듯하다.
그런 박수근의 예술에 대한 검토에 앞서 면저 그분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일별하여 보겠다.
연대기(1) - 6.25동란까지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 읍내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농사를 짓고 장사도 하여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으나 그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광산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본데다가 홍수로 전답마저 물에 잠겨 졸지에 집안 살림이 곤궁해졌다. 지금 정림리의 그의 생가는 헐려 밭이 되었고 뒷동산에는 군인아파트가 들어찼다. 나이가 되어 양구공립보통학교를 다니게 된 박수근은 그림에 재능을 보였는데, 어느날 밀레의 「저녁종」을 사진으로 보고 “나는 이담에 커서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곤궁하여 그는 중학교에조차 진학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독학으로 그림에 열중하여 18세 되는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되자 큰 용기를 얻었다. 그 그림에 나오는 농가는 그의 생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연속 3년간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가정적으로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가산을 정리하여 금강산 마을인 금성으로 들어가고 박수근은 춘천에 홀로 남아 극심한 곤궁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스물이 되기 전의 그의 삶은 이처럼 거의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변함없었던 듯 22세 되는 1936년에는 「일하는 여인」을 출품하여 선전에 입선하게 된다. 나는 그때 청년 박수근의 기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좋았을까? 신인들에게 공모전이 갖는 긍정적인 면이란 자기검증의 기회이고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후 박수근은 선전이 끝나는 1943년까지 해마다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춘천에서 포천으로 다시 서울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박수근은 25세때(1939년), 재혼한 아버지가 동생들과 살고 있던 금성에 갔다가 거기에서 이웃집의 17세 처녀 김복순을 사귀게 되고 이듬해 금성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리하여 금성에서 새 가정을 꾸미게 되었으니 박수근으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가정의 따스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때의 생활상은 부인이 쓴 「아내의 일기」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잠시였을 뿐 신혼 3개월만에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이 되어 아내와 떨어져 평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41년, 박수근이 아내를 평양으로 데려와 다시 신혼의 나날을 보내면서 평양의 화가들과 주호회(珠壺會)를 만들고 전시회에 출품도 하며 화가의 길을 걷다가 태평양전쟁을 만났다. 전란중에 큰아들 성소와 큰딸 인숙을 낳았는데 1944년 미군 폭격이 평양까지 미치게 되자 부녀자 노약자 소개령이 내려 아내와 어린 남매를 금성 본가로 보냈다. 그리고 이듬해 박수근은 홀로 평양에 남은 채 8?15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이 되자 박수근은 도청 서기직을 버리고 처자가 있는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둘째 아들 성남과 셋째 아들 성인이 태어났고 큰아들 성소는 뇌염으로 잃는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
연대기(2) - 6?25동란 이후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박수근은 가족과 함께 금성에서도 몇십 리 떨어진 두메산골로 피란했다가 1?4후퇴 때 가족을 남기고 홀로 남하하였으며 그 와중에 셋째 아들을 잃었다.
1951년(37세) 홀로 남하한 박수근은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에서 노동하며 살아가다가 이듬해 가을 서울 큰 처남 집에 와서 처자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남매를 데리고 남하한 아내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여느 이산가족에 비했을 때 이들은 퍽이나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전란중 박수근은 미8군 PX에서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그림 품을 팔면서 생계를 꾸려간다. 이때 PX에서 경리를 보던 아가씨가 소설가 박완서씨였는데 박완서의 『나목』은 바로 박수근을 소재로 한 소설이고 또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이라는 박완서씨의 증언은 당시 박수근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 무렵 박수근은 창신동 판잣집이나마 마련했다. 휴전 후 속개된 제2회 국전에 출품하여 「집」은 특선, 「노상에서」는 입선을 했고, 이후 56년까지 박수근은 국전에 계속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남한 사회에서도 화가로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게 되고 가정적으로는 막내아들 성민과 막내딸 인애를 낳으며 그럭저럭 지냈다.
그러나 1957년(43세)박수근은 제6회 국전에 1백호 대작의 「세 연인」을 출품했으나 낙선하자 크게 실망하여 슬픔에 빠져 이때부터 폭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듬해 국전에는 아예 출품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반도화랑을 통하여 주로 외국인 미술 애호가들이 그의 그림을 구입함으로써 근근히 생활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마음의 상처를 위로받을 길은 없었다. 당시 박수근의 모습은 반도화랑의 운영을 맡았던 이대원 선생의 「박수근과의 만남」이라는 글에 저간의 분위기가 그려져 있지만 최근에 갤러리현대 박명자 사장이 반도화랑 시절을 회고한 글 속에 아주 생생하게 드러난다.
나중에 미망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박수근 선생님이 (반도화랑에) 자주 오신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작품이 팔렸으면 생활비를 가져가려는 것이었고, 둘째는 저녁에 술자리라도 있는가 궁금해서이고, 셋째는 몸이 부어서 용변을 보기 힘든데 반도호텔에는 양변기가 있어서 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의 큰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박명자, 「나의 삶, 나의 생각」, 『경향신문』1994. 6. 24.)
1959년 박수근은 다시 화가로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8회 국전에서 추천작가로 초대되고 조선일보사 주최 제3회 현대작가초대전에도 초대되어 작가적 자존심을 되찾은 듯, 이후 1965년 타계할 때까지 줄곧 국전에 출품하고 심사위원도 역임하며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국제자유미전에도 출품하였다. 그러나 생활을 곤궁하고, 과음이 계속되면서 신장과 간이 나빠져 몸이 붓고, 49세가 되던 1963년에는 백내장으로 왼쪽 눈을 수술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하여 재수술하는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다. 그러한 지병을 갖고서도 오직 그림 그리기와 술 마시기를 계속하다가 결국은 1965년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의 소재에 대하여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서민의 일상 모습이다.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아기를 업은 소녀, 할머니, 행인, 공기놀이하는 소녀들.......
그러나 박수근의 작품들을 더 자세히 분석해보면 일하는 남자를 그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껏해야 농악을 그린 작품이나 쉬고 있는 지게꾼 스케치 정도가 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물론 추론이지만 우선 박수근이 그린 인물들은 농촌이 아니라 도회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김매기나 새참 같은 농사의 현장을 그린 것이 아니어서 남자의 모습이 더욱 귀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그가 도시의 뒷골목과 장터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행상 여인을 비롯한 일하는 여인상과, 아기를 보는 소녀를 비롯한 소녀상을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서민의 상을 오히려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연약한 여인의 모습이 일하는 남자의 모습보다도 더 천진한 서민의 상에 걸맞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연약하지만 어진 마음으로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따스한 온정이 느껴지는 그분들이 박수근 그림의 주인공이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나무의 의미 또한 그의 인물과 비슷할 것이다. 박수근은 좀처럼 꽃을 그리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남긴 「모란꽃」과 「목련」을 보면 둘 다 화려함이 아니라 애잔한 흰 꽃들이다. 꽃뿐만 아니라 그는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잎새의 표현에도 아주 인색하여 「노목과 어린나무」에서나 겨우 새순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 고목이 지닌 뜻은 아무래도 박완서의 『나목』 끝부분을 읽어보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림의 형식에 대하여
다음은 박수근 그림의 형식상 특징을 살펴볼 차례인데 여기에 대해서 누구든 먼저 그의 독특한 마띠에르 효과를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화강암의 질감을 느끼게 하는 향토적이면서 거친 듯 소박한 느낌이 그의 소재들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 점은 익히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 박수근이 이 마띠에르 효과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획득하려고 했던 조형 목표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다.
박수근 그림의 화풍상 변화를 보면 마띠에르는 거칠고 굵은 데에서 점점 부드럽고 자잘한 질감으로 옮겨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대상 표현도 처음에는 굵은 선에서 나중에는 가는 선으로, 곡선과 묘사적 성격의 선에서 직선과 간결한 요약의 선으로, 은은한 배경에서 완벽한 평면으로 전환된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박수근 그림에 나온 도상들은 만년으로 갈수록 표현의 사실성에서 의미의 상징성으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박수근의 만년작에 이르면 영원불멸의 정지성 내지는 고착성이 두드러진다. 과장되게 말하면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과 같은 느낌이다. 다만 바위가 아닌 캔버스이고 부처가 아닌 서민이라는 것이 다를 뿐 거기 변함없이 의연히 존재하는 상을 지향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같은 「아기보는 소녀」라도 1953년 작품은 굵은 윤곽선과 거친 마띠에르에 움직임이 감지되는 서정적 정경이 동반되지만, 1963년 작품에서는 완벽한 정면성의 원리와 가는 직선이 구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만년의 경향이야말로 박수근 예술의 본령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중세 이콘(icon, 성화)의 분위기는 이런 연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어딘지 종교화적 거룩함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1961년 작 「모자」가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우리 시대의, 또는 서민적 삶의 도상으로 번안한 듯한 인상까지 주고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은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박수근의 예술을 이런 관점에서 더 면밀히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삽화에 대하여
박수근의 예술은 유화, 수채화, 크레파스화, 목판화, 스케치 등 거의 모든 장르가 여러 형태의 자료집에 실려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1차자료가 모두 정리된 듯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이 거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삽화이다.
박수근이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를 그렸는지 아직 규명된 것이 없지만 내가 조사한 바로는 『월간 장업계(粧業界)』에 상당히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삽화를 그렸다. 『월간 장업계』란 화장품공업협회, 줄여서 장협(粧協)이라고 하는 단체에서 발간한 잡지였다. 1958년 12월에 창간된 이 잡지는 국산 화장품 보급을 위한 홍보용 월간지였는데 1960년대 후반에는 격월간으로 되고 1965년에는 장협에서 간행하던 것을 폐지하고 화장품화사마다 독자적인 홍보책자를 발간하게 되어 한국화장품에서는 『쥬단학』, 태평양화학에서는 『향장』등이 선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월간 장업계』를 모두 보관하고 있는 곳이 없다. 장협은 아직도 건재하여 코리아니화장품의 유상옥 사장이 제 11대 회장을 맡고 있는데 이곳에 일부 보관본이 있을 뿐이다.
나목의 그루터기에 쭈그려 앉은 사내의 고단한 표정, 어진 눈망울의 황소,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엄마를 씩씩하게 따라가는 꼬마아이......박수근 삽화에 나오는 분위기는 곧 그의 회화세계의 연장이고 해설이며 그 자체로서 보는 즐거움을 주는 독자적 영역이다. 우리는 그림을 논할 때 ‘삽화적인 요소’란 말을 곧잘 설명적인 데로 흘려버려서 상징성이 살아나지 못하는 결함을 갖는다고 말하지만 삽화는 삽화다워야 한다고 볼 때 분위기를 띄우는 그 나름의 조형언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상 그 자체의 묘사가 아니라 그 대상을 통하여 나타나는 분위기이다. 박수근 회화에서 낱낱 도상들이 일정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그의 삽화와는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특히 그의 삽화 중에는 산동네를 그린 작품에 산언덕을 화강암 절벽으로 표현하고자 돌멩이에 대고 연필로 문지른 ‘프로따주 기법’을 쓴 것도 있어서 그의 삽화와 회화의 연관을 더욱 생각게 한다. 그리고 60년대를 넘어서면서 그의 회화에 나타나는 직선과 요약된 윤곽선도 이 삽화적 훈련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까지 갖게 된다.
아무튼 이 『월간 장업계』에 그린 박수근의 삽화는 아주 재미있고 아름답고 서정이 풍부한 것들이다. 간단한 컷에서는 소탈한 맛을 풍기고 있지만 회화성이 강한 삽화들은 그것 자체가 좋은 밑그림이 되고 있다. 상당히 많은 작품에 “수근”이라는 서명까지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삽화의 조형적 완결성을 보증하게 된다.
나는 박수근의 삽화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보고(寶庫)라고 생각하면서 『월간 장업계』의 완질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박수근과 이중섭 비교론-모방론과 표현론
이제 박수근이라는 작가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다. 지금까지 발표된 박수근이라는 작가상에 대한 연구는 생각밖으로 적다. 대부분 단평에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박수근론은 아직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중 박수근의 상을 가장 근사하게 그려낸 것은 김윤수의 박수근과 이중섭 비교론(「이중섭과 박수근」『한국현대회화사』, 한국일보사 1975)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새삼 두 작가를 비교하여 논할 의사는 없다. 그러나 20세기 한국 근대미술의 마지막 장에서-혹자는 현대미술의 서장에서-만나게 되는 두 거장의 예술적 성취를 여러 각도에서 비교 검토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큰 의미를 지니며 최소한 우리들의 예술적 사고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이중섭이 예술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은 그의 예술이 지닌 표현주의적 성격에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는 대상을 표현하면서 언제나 단순한 재현 이상의 그 무엇을 담아내고 싶어했다. 저 유명한 「소」, 그중에서도 노을을 배경으로 한 소의 눈동자에는 깊은 고독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또 두 마리의 닭이 입맞춤하는 「부부」라는 작품에는 밑모를 그리움의 감정이 표출되어 있다. 어느 경우든 이중섭에게 예술이란 곧 표출 내지는 표현이었다.
서양미학사에서 예술에 대한 개념 정의는-최근에 와서 죠지 디키 같은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가 있기 전까지는-모방설과 표출설로 나누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모방설이 우세했다. 그리스 고전미학 이래로 미학자들은 통상 “예술은 모방이다”라고 규정하여왔고 이것은 19세기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의심받은 일 없는 예술에 대한 문자 그대로 가장 고전적인 정의였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면서 작가들의 개성이라는 것이 강조되고 새로운 예술사조가 숨가쁘게 부침하면서 “예술은 표출(표현)이다”라는 새로운 정의가 내려지게 되었다. 모방론이 갖고 있던 객관주의와 관학파적인 성격은 표출론의 대두로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주관주의 미학과 개성의 구가가 하나의 미덕으로까지 칭송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근대미술의 초기 화가들은 일본의 인상파 영향을 받고 선전을 통해 관학파 화풍을 형성하면서 순박한 모방론의 미학에 알게 모르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섭은 ‘아니다. 예술을 작가 내면세계의 표출이다. 작가 정신의 표현이다’라는 표출론의 미학을 탁월한 형상력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당시로서나 지금이나 매우 신선한 미학이었다.
그러나 박수근의 예술로 돌아서면 “예술은 표현이다”보다도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주장으로 되돌아가버린다. 박수근은 50평생에 4백여 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단 한 점도 작가의 주관적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해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대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면밀한 관찰로써, 다시 말하여 철저한 모방론에 입각함으로써 자기 예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실제로 작품세계 또한 그러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예술은 어차피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대상에 대한 모방이든 어떤 이미지의 모방이든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그려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표출론에서 모방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실 창작자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은 모방일 수도 있고 표출일 수도 있다.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몇번씩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대상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감정에 따를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에서는 작가적 창의력과 개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생각을 폐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상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거나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고자 하는 자기 겸손과 수양을 가볍게 보거나 생각조차 못하는 일도 생겼다.
사실 예술은 표출이라고 주장하는 예술가가 작품에서 무엇인가 표출해야 할 것을 찾지 못했거나 잃어버렸을 때 그는 예술적으로 방황과 혼돈에 휩싸이며 어디에서 그 실마리를 잡아낼지 막막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술은 모방이라는 생각을 통해 대상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서 출발한 예술가는 예술적 딜레마가 생길지라도 그 대상을 붙잡고 늘어짐으로써 흔들리지 않고 풀어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표출론의 이중섭 작품에는 강한 감동의 울림, 긴장과 갈등, 강렬한 터치 등이 드러나고 있지만 박수근 작품에는 반대로 조용한 관조와 평화로움, 대상의 평면화라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미술적 과제를 풀어가는 시각에서 이중섭과 박수근의 미학적 토대를 다시 검토해볼 때 작가에 따라서는 부박하게 들떠 있는 표출론에서 진득한 모방론으로 겸손하게 내려앉을 필요도 적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현대문화사에에서 갖는 위치
해방50년과 새천년을 맞으면서 신문과 잡지에는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어울려 20세기 또는 20세기 후반기 각 분야의 성과를 교체 검토하는 학제간 교류가 활발했다. 나 또한 해방 5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많아지면서 20세기 후반 한국문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자리에 미술평론가 자격으로 참석한 일이 있다. 정치,경제,역사,문학 등의 전공자들 틈에 내가 낀 것이다. 각 분야마다 지난 50년의 문화적 흐름을 발표하고 그 내용을 가로 세로로 교차하면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내용인즉 8.15해방, 해방공간의 이데올로기 대립, 6.25동란, 냉전체제, 모더니즘적 사고와 서구문화의 적극적 이입, 4.19혁명, 5.16군사구테타, 외채도입과 근대화작업, 신중산층 형성, 80년대의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질곡, 87년 6월항쟁, 90년대 문민정부의 등장과 동구사회의 개편 등을 줄거리로 엮어가면서 각 단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현상을 교감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당히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인문정신이 발현되는 방식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또 그 시대 고뇌의 상징을 지닐 수 있는 분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1950년대를 보내면서 그 시대 인간, 특히 서민 또는 민중이 갖고 있는 삶 의 정서를 박수근만큼 절절한 감정으로 표현한 학자가 있습니까, 정치가가 있습니까, 사상가가 있습니까, 소설가가 있습니까, 시인이 있습니까? 박수근은 그 시대 서민의 실상을 체득하면서 그 아픔에 동참했고 사랑으로 삭히면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혹자는 박수근의 작품 속에 나오는 서민은 정치의식의 결여로 각성되지 못한 아둔한 민중이라면서 그의 리얼리즘의 한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박수근의 한계가 아니라 그 시대의 한계였습니다. 박수근은 혁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실된 화가였습니다. 그의 진실된 눈이 포착한,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외면한 세계의 증인으로서 화가의 몫을 해낸 것입니다. 박수근 작품 속의 서민들이 각성된 민중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김지하의 「황토」로 나타나고, 20년이 지나서 오윤의 목판화로 나타나고, 또 30년이 지나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박수근은 그림이라는 미미한 도구를 갖고 위대한 사상가 못지 않은 인간정신의 고귀성을 표현했다. 뛰어난 지성이나 예리한 감성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면밀히 관찰하여 부동(不動)의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아들에게 가르쳤다는 “더욱더 작아지게 하소서”라는 겸손의 미덕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서민들이 차라리 거룩한 느낌으로 다가오면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치장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 본연의 소박한 자세를 끊임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박수근 미학이 지닌 보편적 가치를 찾아보게 된다.
이것이 내가 그리고 있는 박수근이라는 화가의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