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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절의 박수근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2-01-27 17:21:03 조회수 315
평론가 대담 황유엽 서양화가/장리석 서양화가

장: 박수근씨와 만나게 된 것은 모란봉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였지요. 그 양반도 그림 그리러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셈이지요. 그 때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적었으니까 만나면 바로 친숙해졌어요. 아마 그 때가 초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양반도 객지 생활을 해서인지 겨울옷을 입고 나왔어요. 갈아입을 의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몇심전만 있으면 대단한 돈이 되었어요. 그럼 끝나면 으레 빈대떡하고 대포 한잔 하는것이 상례였지요.

박수근씨는 전매청에 있는 그 밑에 조그만 방 한 칸을 빌어 가지고 있었어요. 가보니까 방안에는 미즈에도 있고 데상 스케치한 것, 수채화 그린 것을 벽에 걸어 놓았어요. 요사이에는 집주인마다 여관집이다 등 거창하게 나오지만 그 당시 평양에서는 집주인과 셋방사는 사람이 한가족처럼 지냈어요. 그 집 주인도 할머니 혼자라서 적적하니까 박수근씨와 가족처럼 지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평남도청에 취직이 되었기 때문에 출퇴근을 가까이에서 하느라고 그곳에 하숙을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돼요.

그 당시 박수근씨는 [선전(鮮展)]에 출품한다고 작품을 그리고 있었지요. 우리가 요즈음 접하는 그런 그림이 아니고 세가지 정도의 색을 썼던 기억이 나요. 흑백 애플즈옐로우, 약간의 분홍빛 같은 것을 넣어서 대체로 컴컴한 그림들을 그렸지요. 절구 찧는 걸 그리고 있었어요. 그게 입선되었지요.

그리고 그 전에 초임선한 게 있었는데 <봄이 오다>로 산비탈에서 부인네들이 나물 캐는 모습을 소재로 한 것이었어요. 보통 때는 직장이 있어서 못 만나고 토요일 일요일에만 만났지요.

황: 토,일요일을 이용해서 같이 만나고 주로 모란봉이나 보통 벌에 나가 거기서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 어울려 다녔지요. 그런데 그 양반이 키는 크고 거대했지만 원래 성격 자체가 온순하고 착했어요. 여태껏 지내오면서 말다툼한 예가 없어요.

그 당시엔 액자에 그림을 끼워서 걸어 놓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저 압정으로 눌러 놓는 정도였지요. 또 물자가 귀해서 종이가 없었어요. 그림 그린다는 게 돈이 있어 여유있는게 그리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가족들이 반대도 하고 해서 자기 용돈이나 절약해 가지고 물감을 사 쓰고 그렇게들 했지요. 목판화로서 [선전]에 제일 먼저 입선한 작가로는 최지원씨가 있었는데, 이 작가는 광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했어요. 아버지도 없고 집도 가난해서 학교를 못 다니고 독학을 했지요. 그림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썼어요. 그 때 평양박물관에 오노라는 일본인이 있었는데 우에노 미술학교를 나왔어요. 그 동생도 판화를 했어요. 그런데 그이가 최지원씨를 잘 봤어요. 그림도 좋고 글도 달 쓰고 하니까 최지원 씨를 도와주었지요. 그 때 호를 지어 주었는데 그것이 '주호(株壺)'예요. 그런데 키가 나보다 더 작았어요. 성년이 되어 혼기가 가까워 오자 선이 오고가고 했지만 번번히 키 때문에 퇴짜를 맞았어요. 마침 문경새재에 취직이 되어 와 있었는데 또 선을 보았던 모양이예요. 물론 퇴짜를 맞았지요. 화가 나서 집에 와 독주(35도)를 단 숨에 마시는 바람에 위경련으로 죽었어요. 그래서 재주가 너무 아깝고 불쌍해서 주호를 황유엽, 변철한, 홍건표, 박수근씨등, 오노도 참가했어요.

처음 1주기를 맞아서 기념전을 가졌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림 경향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완전한 사실도 아니요, 또 추상도 아닌 인상파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하고도 거리가 있었어요.

장: 최지원씨를 일본사람들이 평가하기를 한국의 밀레라고 했습니다. [주호전] 때 박수근씨의 작품경향은 주로 흑백으로만 그림을 그렸어요.

황: 전람회 장소는 대개 백화점 화랑이었어요. 평양 화단의 반응은 대단했어요. 그룹을 형성해서 하는 것으로는 우리가 제일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단체전도 우리가 처음이었지요.

장: 1940년대에는 그룹전이 드물었어요.

황: 그 당시 평양엔 그룹전이라는 게 없고 도에서 무슨 공모를 한다든가 개인 전시회를 한다든가 하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오노 선생은 동경미술학교를 나왔고 그 동생도 화가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작가 선정도 화풍이 어느 정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였던 것 같아요.

장: 오노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골동품에 반하여 그걸 연구했었지요.

황: 좀 특수한 사람이었지요. 우리를 굉장히 이해해 주었어요.

장: 그 분이 최영림씨가 일본갔을 때 무나가다씨꼬한테 소개장을 써 주어 그를 알게 되었지요. 무나가다씨꼬라는 분은 우리 [주호전]이 이렇게 오래 계속된 것은 비슷한 연배의 또래들이 뜻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수근씨는 2년 선배라고 해도 평생 가야 말 몇 마디뿐이었지요. 뭐라고 물으면 '아 그래, 그렇게 하지.' 이 말뿐이예요.

황: 그 당시에는 생활이 어려울 때니까 그러했겠지만 최지원씨나 박수근씨나 비슷한 생활 모습이었어요. 최지원씨 집에 가 보면 농짝 서랍 뒷면에 판이라는 판은 전부 판화로 메워져 있었고...

장: 버드나무가 돼서 파기도 좋았을 겁니다. (웃음)

황: 그럴 정도로 가난하면서도 그림을 그렸지요. 우리 박선생도 부인 말씀을 들어보면 무척 가난했던 모양이예요. [주호전]을 해방된 후에는 못했습니다. 해방되었다는 들뜬 마음에 자기의 갈 길을 가느라 당분간 쉬었지요. 박수근씨만 해도 해방되니까 고향쪽으로 가서 교편을 잡았으니까.

장: 자리가 잡힌 뒤에 계속하려고 했는데 공산당 찬양하는 그림 외에는 그룹전이나 개인전은 용납이 안 되었거든요. 그러다가 서울 와서 창신동 박수근씨 집에 처음 갔지요. 지금 화가가 된 장남이 그 때는 코흘리개였어요. 마루방에 그림들이 주욱 널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황: 나는 화신 뒤에 있었기 때문에 접촉이 많았습니다. 화신 뒤니까 교통이 좋았지요. 그러니 자연히 접촉이 많을 수 밖에. 항상 만날 때는 자기 그림 다 그린 오후5시~6시쯤이었습니다. 만나서 대포한잔 하는 시간이지요. 그러나 만나도 그이는 말이 없어요. 그저 한번씩 웃기만 했어요. 음성 자체가 그 체구에 비해 작은 음성이었어요. 술을 마셔도 말 몇 마디 하고는 그만 일어났어요.

장: 내가 제주도에서 와서 보니까 평면화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군요. 특별한 색깔도 없고 검정색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황: 여기 와서 제2회 [국전]때 나와 같이 출품했습니다. 그이도 특선하고 나도 특선했었는데 그 때의 작품을 보면 처음에도 그이는 색을 많이 안 썼어요. 그 당시는 [국전]이나 무슨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평도 하고 술도 먹어 가며 도와주었거든요. 그럴 때 항상 우리들이 색을 좀 써 보라고 하면 잘 알겠다고 하면서도 변하지 않았고, 아마 말년에 가까이 오면서 색을 조금 썼지요.

장: 그 양반 평양시절, [선전]에 출품했던 시절인데 9년간 연속 입선했어요.

황:수채화로 2년 입선했다가 그 다음 한 2년 건넜다가 마지막에는 계속 입선했지요.

그이에 대한 생각을 지금 해 보면 우리보다 두 살 위고 덩치도 크고 [선전]도 먼저 입선해서인지 몰라도 너나하며 지냈어도 마음으로는 그이를 존경했습니다.

장: 그 사람은 생활이 아름다왔어요. 생활이 소박하면서도 부부지간의 정이 두터웠지요.

황: 부인의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랄까 내조랄까 참 대단했어요. 친구들이 오면 대포 한잔 먹으러 나가거든요. 그림 그리다 말고 나가면 부인이 빨래하고 애들 키우기도 바쁜데, 팔레트도 씻고 붓도 얼마나 정성으로 빠는지 석유에 먼저 빨고 그 다음에 비누에 곱게 빨아서 보관했거든요. 그런 내조는 웬만한 고가의 부인도 못 해요.

장: 정말 힘든 시절에 훌륭했어요.

황: 그이는 기독교인이었지요. 부인도 원래 기독교인이었어요. 평양시절부터. 그렇지만 교회는 잘 안 나갔던 것 같아요. 그러나 생활관은 부인 따라서 기독교적인 생활을 했지요. 그 사람 작품성을 보면 취급하는 것이 전부 가정에서 출발했지요. 자기의 가난한 생활이나 서민 생활을 주로 소재로 다루었어요.

장: 그이 생활은 참 근면했어요.

황: 작가의 성격이나 그림의 내용들이 일치해요. 지금 후회가 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박수근씨가 [국전]에서 출품했다가 찾아오면서 화신 뒤에 있는 나에게 작품을 주고 갔거든요. 30호 크기인데 이리 저리 굴리고 다니다가 캔버스를 살 수가 없어서 그 그림을 뜯어서 뒤에다 그렸나 봐요. 그 당시는 그림 보관할 만한 장소가 없어서도 많이 없어졌지요. 또 우스운 일은 요리집에 가서 여자를 앉혀 놓고 술을 먹을 때 옆에 앉은 여자손을 잡아도 되나 하고 물을 정도로 순진했어요. 죽을 무렵에는 가서 손도 잡아보고 했지요. 그동안 훈련이 된 모양이예요.

장: 좌우간 그런 사람이예요. 환도해서 창신동에 집을 마련하게 된 것은 미 8군에서 초상화 그려 주고 싸게 받은 돈을 모아서 샀지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말이지요.

황: 아마 이북에서 넘어온 친구 중에 제일 먼저 집을 마련했을 겁니다. 그 때 나는 혼자여서 나를 자기집에 데리고 가 부인이 저녁도 해주곤 했지요.

장: 그 때의 그림 그리던 시절이 제일 다정했고 재미있었어요.

『朴壽根1914-1965』 (1985, 열화당)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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