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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밀레, 人間 박수근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2-01-27 17:19:53 조회수 352
평론가 정현웅

농민화가 밀레의 <만종> 원색도판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어린 소년 박수근은 “하느님 저도 이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옵소서”라며 늘 기도했다 한다. 동화 <프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처럼 그림 밖에 몰랐던 화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과 서민의 정서를 따뜻한 화폭에 담아온 박수근의 소설같은 인생길을 따라가 본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당시에 영향을 미쳤던 일본의 화풍이나 어느 특정인의 영향을 받지 않고 토속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위에서 쉽게 눈에 띄는 고목나무라든지, 시골의 풍경, 또는 아이를 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후기에 마티에르의 수법을 활용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특징 없이 소박한 시골의 풍경을 다루었으며, 그 기법에서도 선대의 작가군에 줄을 세울 수 없다. 그것은 박수근이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상급학교도 진학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화가에게 사사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실제 꿈은 상급학교에 진학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집안 형편이 그렇지 못했다.

궁핍한 시대의 화가를 꿈꾸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보통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취미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화가의 길을 걸으려는 생각보다는, 그림 그리기가 좋아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을 학교 교장이 발견하고 후원해 주었다. 당시 조선미술 전람회가 있었으나 박수근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학교 교장이 박수근에게 출품해 볼 것을 권했다.

박수근이 18세 되던 1932년 제11회 선전에 <봄이 오다>라는 제목의 수채화를 출품했는데, 그것이 입선했다. 선전의 입선은 박수근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고, 그 자신 화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계속 그림을 그리기에는 가정 형편이 궁핍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눕게 되었고, 아버지는 하던 일이 실패하면서 빚더미에 앉았다. 박수근의 나이 21세 때인 1935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박수근은 살림을 맡아 하면서 그림 공부를 했으나, 가난이 극심하여 도화지나 도화연필을 사기조차 힘들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도화연필 대신에 목탄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목탄은 도화연필 못지않게 효과를 내기도 하고, 목탄화를 그릴 수도 있었다. 그는 뽕나무를 잘라다 태워서 그것으로 목탄을 만들어 썼다.

그의 집안은 점점 더 어려워져 부채를 갚기 위해 집을 팔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식구들이 흩어지게 되는데, 그의 부친은 시계 도구를 사서 노점상을 하기 위해 강원도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박수근의 동생 동근(1941년에 사망)은 손재주가 있어 뒷방에서 비행기 장난감을 만들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사상범으로 몰려 서울 형무소로 가고, 막내 동생 원근은 서울 용두동에 있는 누나 집으로 보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수근은 약간의 노자를 준비해 춘천으로 나갔다.

춘천으로 나온 박수근은 약사리에서 하숙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몸집이 크고 건장해서 노동판에서 그를 잘 받아주기는 했지만, 노동품만 팔며 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춘천에서 습작을 하던 무렵인 1936년에 <일하는 여인>이라는 그림으로 제15회 선전에 입선했다. 그 이후 제16회에 수채화 <대춘(待春)>이 입선되고, 제17회 선전에 유화 <농가의 여인>이, 제18회 선전에 유화 <여일(麗日)>이 입선되었다.

춘천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연거푸 선전에 입선을 했지만, 그림을 사자는 사람이 없어 그림 그리는 일로 생활할 수는 없었다. 겨울이 되면 노동판도 쉬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게 쪼들렸다. 추운 겨울인데도 하숙비가 여러 달 밀리자 불을 때주지 않아 그림 그리려고 떠놓은 그릇에 담긴 물이 얼 정도였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가끔 들러 굶주려 있는 그를 보고 딱해서 호떡을 사다준 적도 있다.

박수근이 춘천에서 어려운 그림 공부를 하면서 활동하던 1936년 무렵에 금강산으로 떠난 그의 부친 박향지는 시계 도구를 길거리에 펼쳐놓고 관광객들의 고장난 시계를 수리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젊은 한 여자를 만나 재혼했다. 재혼을 한 박향지는 그해 가을 금성으로 이사를 하여 금성우체국 앞에 초가집을 사서 명신당시계점을 차렸다. 박수근은 계속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춘천에서 박수근은 도청사회과장 미요시(三吉)라는 일본인 친구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 그의 그림에는 마티에르 기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지만, 흑색·갈색 또는 재색을 즐겨 사용하는 습관은 훗날까지 이어졌다.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들

박수근은 1939년 2월에 금성에 있는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이웃에 사는 17세의 처녀 김복순과 결혼을 한다. 그때 춘천 도청의 사회과장으로 있던 일본인 미요시가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전근된 후 박수근의 일자리를 마련해서 불렀다. 박수근은 평양으로 떠나고 아내는 시동생들과 함께 금성 집에 남는다. 신혼 초에 평양과 금성으로 갈라져 본의 아닌 별거를 하게 된 두 사람은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보낸다.

박수근은 자신의 생애에서 두 번의 직장생활을 하게 되는데, 평남 도청 서기로 일하던 일과, 금성에서 금성중학교 미술 교사로 있었던 일이다. 박수근이 평양에 머물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취사용구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평양 기림리의 창동교회 집사의 문간방을 얻어 사용했다. 그런데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직장을 다니는 박수근의 동생과 처남도 함께 기거했다. 거기다가 박수근의 화실도 겸하였다.

그는 퇴근 후나, 직장이 쉬는 일요일에는 선전에 낼 그림을 그렸다. 그때 아내를 모델로 해서 그린 <맷돌질하는 여인>이 제19회 선전에 입선했다. 박수근은 당시 평양에서 그림을 그리던 다른 화가들과 교분을 가졌는데, 장리석(張利錫) 화백은 평양에서 만난 박수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수근 씨와 만난 것은 모란봉에서 그림을 그리면서였지요. 그 양반도 그림 그리러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셈이지요. 그때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적으니까 만나면 바로 친숙해졌어요. 아마 그때가 초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양반도 객지 생활을 해서인지 겨울옷을 입고 나왔어요. 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박수근 씨 집엘 가보았죠. 전매청이 있는 그 밑의 조그만 방 한칸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는데, 스케치한 것, 수채화 그린 것을 벽에 걸어 놓고 있었어요.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니 세 가지 색을 쓰는 것 같았는데, 흑백 에플즈 옐로, 약간의 분홍빛 같은 것을 넣어서 주로 컴컴한 그림들을 그렸지요.”

박수근은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1월에 평양 도청 근무를 그만두고 금성으로 가서 중학교 미술 선생으로 일했다. 미술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그림을 그리는 일은 별개였지만, 그러나 미술과 관련된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그에게 큰 의미를 부여했다.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무렵이었는데,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소품 한 점에 쌀 한 말

금성에는 십리장림(十里長林)이라는 긴 숲의 고목터널이 있었는데, 길 양쪽에 고목나무가 10리에 뻗쳐 우거져 있었다. 박수근은 그 고목을 스케치하기를 즐겼다. 고목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십리장림의 고목 터널 그림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전란중 폭격에 타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당수의 그림은 그가 6·25때 피난을 오면서 산속에서 장독에 넣어 땅속에 묻어두었는데, 휴전선으로 막히자 다시 그곳에 갈 수 없어 잃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산속의 어딘가에 박수근이 숨겨 놓은 장독 속의 그림이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6·25전쟁은 예술가에게나 일반인에게나 극심한 굶주림과 공포의 시기였다. 평시에도 그림 팔아 생계 유지를 하기 힘들었는데 전쟁시에 그림을 팔아 생활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박수근은 처음에 미군 CID(범죄 수사대)에 들어가 환경미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미8군 PX 초상화 매점에서 일했다. 초상화 그리는 일은 예술적인 감각보다도 기능적인 일이었지만, 그 일로 생활을 했고, 창신동에 조그만 집 하나를 사기도 하였다. 초상화 그리는 미군 PX매점에서 일했던 소설가 박완서가 당시에 만난 박수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어느날 그(박수근)가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장이가 화가 될 줄 아남' 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띤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촌부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선전에 입선한 그림이라고 했다. 당시 내가 일제시대의 관전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겼던 것 같진 않다.

그러나 간판장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해 있던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그가 초상화를 그려 창신동에 집을 마련하고 나서 그린 그림으로 1953년 가을 제2회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집>이 특선한다. 종전 후에 박수근은 오로지 그림을 그려서 생활하는 전업 화가가 되었다. 소품 한 점에 쌀 한 말 정도 얻는 것이다. 박수근은 그림을 많이 남겨놓지 못했다. 물론, 초기 작품을 잃은 탓도 있지만, 50년대 후반과 60년대에 그렸던 소품 상당수(70여 점 정도)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의 밀러라는 여기자가 그의 그림을 미국인들에게 팔아 주었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51세인 1965년 봄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에게는 자녀가 5남매 있었지만, 둘은 질병으로 죽고, 장남 성남(城男)과 차남 성민(成民), 장녀 인숙(仁淑)이 남아 있다. 성남과 인숙은 화가로 활동하는데, 인숙은 아버지와 같은 기풍으로 마티에르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볼 때 아버지는 그야말로 그림 그리는 일 이외에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 분일까 자문해 봅니다. 아버지의 그 융통성 없음이나 주변머리 없음을 지적한다는 것은 딸자식으로서 할 도리는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일 이외는 아무것도 못 하셨어요. 생활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거의 완벽하리만큼 처리하셨어요. 두 분은 천생연분이었지요. 어쨌든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아버지였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그림 수입으로 생활을 했어요. 70년대를 지나면서 아버지의 그림 값이 치솟기 시작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80년대를 지나면서 어지간한 크기의 아버지 그림 한 장이 집 한 채 값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왜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는 그렇지 못해서 그 가난한 화가의 생활을 해야 했는지, 돈이 없어서 택시를 타지 못하고 편찮은 몸을 항상 힘겹게 끌고 다니셔야 했던 때를 생각하면 자꾸 목이 메어집니다.”

예술가는 가난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그것은 지나온 시대의 현실에서는 예술이 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 다른 현실 속에서 한 시대를 살다간 가난한 예술가 박수근을 돌이켜 본다. 박수근이야말로 바로 가난한 예술가였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간 화가였다.

 

특별기획 | 박수근의 삶과 예술. 월간미술 199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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