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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포근하신 아버지-나의 아버지 박수근

 나는 시골길을 가다 어느 마을 마당에 눈길을 모은다. 따뜻한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은 마당 한가운데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과 병아리,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귀여운 강아지, 참으로 평화스런 풍경이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거짓이 없는 자연의 순수한 모습처럼 욕심이 없으신 편안한 표정은, 따뜻한 햇살처럼 우리 식구들을 훈훈하게 해주셨고 나를 그 안에서 티없이 맑게 자라게 해주셨다. 내가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원동력은 편안하고 포근한 아버지의 분위기와 선한 아버지의 눈빛 이였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하루에 한 두 마디 하실 정도로 과묵하셨지만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께 꾸중을 들은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실수를 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실수를 해도 아버지께서는 야단치시는 일이 없으셨고 다만 무언의 행동으로 나에게 교육을 시키셨던 것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붓 빠시는 일을 나에게 시키셨다.

 나는 수돗가에 꾸부리고 앉아 붓에 일일이 빨래 비누를 칠한 뒤 손으로 비벼 빠는 작업을 몇 번씩 반복하는 일이 싫어 대충 빨아서 아버지께 갖다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붓 속을 헤쳐 보시더니 유화 물감이 묻어있는 붓 속을 보여주시며 붓 속까지 깨끗이 비누칠해서 빨아야 한다고 일러 주셨다.나는 붓을 다시 들고 수돗가에 와서 아버지께서 일러주신대로 하지 않고 비누칠을 해서 한 번만 빨고 다시 갖다 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붓 속을 또 보시더니 화도 안 내시고 하기 싫으면 그냥두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얼른 안방으로 왔다. 잠시 후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안방에서 나와보니 아버지께서는 꾸부정하게 앉으셔서 내가 빨았던 붓을 일일이 빨고 계셨다.

 나는 꾸부정하게 앉아 붓을 빠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에게 화를 내시며 회초리를 드시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는 나한테 오시더니 붓은 이렇게 빨아야 수명이 오래간다며 붓 속을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이 자율적으로 나를 반성하게 했고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요인이 되게 했다.

 우리 식구가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곳은 창신동 집이다. 1950년대 6.25전쟁으로 아버지께서는 남으로 피난하시고 도중에 남은 식구들은 북쪽 방공호에 살았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이남으로 죽으나 사나 아버지를 찾아가자고 말씀하셨었다. 어느 날 작은 아버지와 의논하신 끝에 결심을 하시고 식구들을 데리고 칠흙같은 밤 중에 남으로 걸어 오다가, 중간에 미군을 만나 소원하시던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남으로 오셨다.

 그 후 안양수용소에서 고생하고 노력한 끝에 아버지를 만나게 됐다.

 우리를 처음보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와 자식을 보시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아버지.

 생전 먹어보지도 못했던 바둑껌을 주시며 "너희들 만나면 주려고 모아두었지."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정이 담뿍 담긴 바둑껌을 씹으며 신기하게 느꼈던 나와 동생.

 그날 밤 아버지께서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우리를 꼭 끌어안고 주무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식구가 오붓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하셨는데 주인이 살지 않는 빈 집을 지켜주는 대가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어 그 곳에서 우리 식구의 보금자리가 시작되었다.

 그 때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직업을 갖게 되어 수입이 생겼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벌어다 주시는 돈을 알뜰하게 모으셔서 창신동 집을 사게 됐다.

 모양은 단조로운 집이지만 우리 식구의 얼굴에 웃음과 꿈과 안식처가 되어 주었고, 건넌방은 세를 주고 우리 식구는 안방에 모여살고 안방과 마루가 아버지의 화실이 되었다. 어떤 때는 웃목이 나의 차지라 추워서 이불을 푹 써야 코가 시리지 않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께서는 외출 나가셨다 돌아오시면서 먼 곳에서 우리집 용마루만 바라보아도 자랑스럽고, 식구들이 있는 집에서 그림까지 그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어머니께 가끔 말씀하셨다. 마루 처마 끝에는 제비가 집을 지어 제비똥이 어머니의 일거리를 더해 주었지만 매년 제비가 찾아오는 것을 우리 식구는 좋아했고 기다렸다.

 아버지의 화폭에는 벌써 제비가 그려져 있었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하모니카를 불면 어머니께서는 노래 부르고 나와 동생은 그 분위기에 푹 파묻혀 흐뭇해 했었고, 지금도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뻐꾹 왈츠를 들으면서 그 때를 회상하곤 한다.

 한번은 밤 중에 도둑이 건너방을 기웃거리는 걸 어머니께서 보시고 놀라서 도둑이야 하는 발음을 돌돌돌둑이야...하시며 아버지를 깨우셨다. 그 때 아버지는 남자답게 문을 박차고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이 겁을 내시고 이상한 소리를 외치니깐 건넌방에 사시던 아저씨가 잠이 깨셔가지고 왜 그러냐고 물으셔서 도둑이 들어왔다고 하니깐 몽둥이를 들고 대문 밖으로 잡으러 나가셨다. 한동안 아버지께서는 어머니한테 놀림을 당하셨다. 여자처럼 마음이 여리고 순진하고 쑥맥이라고...

 

 이렇게 창신동 집에서는 재미있는 추억과 동시에 아버지의 작품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마루에 앉아있으면 아버지 그림이 벽면에 가득 붙여져 있어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물건 팔러 오셨다가 아버지께서 도마 위에 감 그린 것을 보고는 웬 감이 벽에 붙어있냐고 물어봐 한바탕 웃은 일도 있었다.

 그 때에 우리집 사정은 궁핍했다. 어쩌다 미국 사람들이 그림보러 집에 온다고 하면 우리집은 대청소에다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 손님이 오시면 나와 동생을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부엌 널판지 사이로 내다보며 그림이 많이 팔려 맛있는 것 좀 많이 먹었으면 하며 마음을 설랬다.

  그림이 팔리면 어머니께서는 쌀을 사셨다. 그 날은 흰밥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식구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표정도 흐뭇하셨다. 며칠 지나 쌀을 아껴야 한다고 하시며 콩나물 죽, 수제비가 시작되면 나는 싫었지만 어머니께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고 하셨다. 특히 수제비는 더 싫었다. 밀가루 음식은 그 당시에 너무 먹어서 그런지 지금도 싫어한다.

 아버지께서는 시간이 나시면 신문에 난 기사나 연재소설, 그림 등을 오려 스크랩북을 만드셨다.

 우리들 크면 보라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주몽 이야기, 호동왕자와 낙랑 공주 등을 수채화로 종이에 그리시고 글의 이야기 내용도 적어놓으신 것을 심심하면 꺼내 읽고 상상의 날개를 펴곤 했다.

 책을 직접 만들어주신 이유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책을 못 사주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식구 한사람 한사람을 공들여 아끼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이 가끔 있었다.

 아버지께서 외출하시는 동안 나는 아버지 그림 도구를 호기심이 나서 들쳐보고 열어 보았다. 종이 상자에 몽당연필이 가득 차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내가 버린 몽당연필들이었다. 그것을 모아 깍지를 끼어 아버지께서는 스케치를 하셨던 것이다.

 얼마나 알뜰하신지 모른다. 외출하실 때에도 밖에 걸려있는 빨래를 새댁보다 더 얌전히 개어 놓으시고 요강도 깨끗이 부셔주시는 것이 매일 되풀이 되셨다. 어머니께서 힘들어 하신다고 자상한 친정어머니처럼 돌봐주셨던 따뜻한 우리 아버지.

 중고등학교에서 공납금이 밀려 어머니께서 인숙이 공과금 걱정을 하시면 걱정말아 하시며 아끼시던 화집을 들고 나가셔서 팔아 공납금을 마련해 주신 아버지.

 외출했다 돌아오실 때는 우리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시려고 엿 두 가락, 군고구마 등이 들어 있는 6절 정도로 교과서를 뜯어서 만든 봉지를 들고 들어오시면 아버지 손만 바라보던 우리들은 눈이 반짝이며 깨엿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시던 아버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지금에야 철이든 나로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

 창신동 집이 사기꾼한테 잘못 사서 나중에는 보상도 몇 푼 못 받고 전농동 집을 샀을 때 아버지 그림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창신동 집보다 좀 크고 깨끗한 집이라 우리 식구는 희망에 차 있었지만 전농동 집은 내 기억에서 떠올리고 싶지가 않다. 그 집에서 아버지께서 편찮으셨고 편찮으시면서도 가끔 일어나셔서 그림을 그리시던 모습이 가끔 꿈에 나타나면 안타깝다. 아버지가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뜨신 집이기 때문에 별로 정이 안간다.

 세상을 뜨시면서도 어머니께서 "여보, 죽지 마세요." 하고 우시니까 느린 목소리로 "내가 죽긴 왜 죽어. 걱정들 하지마." 하시던 아버지. 돌아가시면서까지 식구들을 걱정하시는 아버지의 착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께서 남다른 데가 있다면 일생동안 그림과 어머니 그리고 우리들을 사랑하셨다는 점이다. 고지식하셔서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시지는 못하셨지만, 가난한 사람을 아끼고 측은히 여기는 애정어린 진실이 아버지 그림 구석구석에 배여 아버지의 모습이 곧 그림이 아닌가 생각한다. 끝으로 전시회를 마련해 주신 박명자 사장님 이하 아버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일일이 찾아뵙지 못하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스럽다.

 감사합니다.

우람한 손을 가진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노래를 못하신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진다. 어머니는 이런 표정을 재미있어 한다. 성화에 못이겨 하모니카로 노래를 대신한다. 뻐꾹 왈츠서부터 신나게 서너곡 불어 젖힌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음악 소녀가 된다. 정말 아버지의 뻐꾹 왈츠는 신나는 곡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은 엄마 닮으면 어여쁜 앵무새가 되고 아버지를 닮으면 총대 없는 뻐꾸기 병정이 되곤 한다.

 놀이에 미친 나의 유년시절은 언제나 아버지의 걱정거리를 하나 더해 주었다. 그림에 열중하시는 아버지에겐 커다란 방해꾼이었고, 더더욱 어머니 심부름엔 철저한 방관자였다. 풀떡, 보리밥, 강냉이죽 주는 대로 뚝딱 해치우고 밖으로 줄행랑친다.

 배추밭에 물을 주어야 했고, 자동차길 따라 작은 집에 가야했던 심부름도 놀이에 까맣게 저당잡힌 채 달이 뜰 때까지도 잊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의 종아리는 아버지의 큰 손에 쥐어진 붓대로 불이 나는 것이다.

 '창신동 집'은 아버지가 월남하신 후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하신 소산으로 마련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미닫이 문이 없는 마루를 중심으로 마주 보노라면 오른편에는 안방과 부엌, 왼편에는 내가 종아리를 맞을 때면 나의 역성을 들어 주시던 형권이 아주머니가 살던 건너방이 있다. 그리고 화장실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남향의 ㄷ자 형의 한옥이었다.

 아버지의 화실인 마루는 동네 아주머니와 기름장사 아주머니 그리고 각종 행상인들이 잠시 걸터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부채 할아버지의 장사길을 재촉하는 쉼터이기도 했고, 때때로 몇 사람의 외국인들이 서성이며 그림을 감상했던 화랑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틈틈이 나의 개구장이 친구가 온통 소란을 피우거나 북적거리기도 하고, 한겨울 따뜻한 햇살 한구석에 땀과 먼지에 버무려 놓은 옷가지를 조용히 빨래하시는 어머니의 빨래터이기도 한 생활터였다.

 이렇게 사노라면 으레 궁색한 우리집에 찾아주는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그림에도 등용된 연미형의 꼬리를 가진 제비이다. 이들의 성화는 어찌나 극성인지 배설물을 안방이며 마루며 두루 다니며 그림에까지 발라 놓는 것이다. 얼핏 보아도 아버지 그림의 주조색과 너무 흡사하다. 제비들의 배설물을 닦아내는 곤욕이 우리 가족들의 심심찮은 소일거리가 되곤 했다.

 "얘야. 제비가 알을 많이 품으면 풍년이 된단다."

 이렇게 말씀하신 아버지는 고향 금성에 두고 온 처마밑의 제비둥지를 연상하시곤 한다. 그럴 때면 사선을 넘어 온 이야기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줄줄이 엮어져 나온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정경어린 신혼 시절의 그림, 불에 타 버린 그 숱한 스케치들을 생각하시면서 아버지는 다시 붓을 잡으신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 말은 아버지의 담백하고 솔직한 예술관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그림으로 이 예술관을 실천해 보였다. 다시 우물물을 긷고 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하는 소박한 생활과 더불어.

 철부지 시절, 놀이에 정신을 팔아 버린 나에겐 아버지의 그림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나뭇잎 하나 없는 나무도 그렇고, 때때로 눈, 코, 입이 생략되어 버린 인물화도 그렇다. 어쩌다 학교 선생님의 지시로 부탁해서 그려 주신, 노란 바탕의 간략한 선으로 그려진 삼일운동 포스터도 그랬었다. 어린 나에게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그림도 못 그리며 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일가친척 외에 대다수의 동네사람들도 인정하는, 무능력한 성남이 아버지였다. 어머님이나 아버지를 이해하는 주위의 소수를 제외하곤 아버지의 일이나 아버지의 정신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아버님은 항상 말씀하셨네. "더욱더 작아지게 하소서."

 아버님은 제가 12살 되던 해에 고인이 되셨기 때문에 저는 아버님을 직접 겪었다기보다는 어머니를 통해서 또는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버지를 접하고 느끼며 자라왔습니다.

 어려서 기억으로 아버님은 별로 말씀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말보다는 실천을 더 중시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의 사상과 철학은 글이나 말로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 보다는 행동하셨던 것과 그림에서 그분을 느껴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그분을 알 수 있는 행동과 그림을 통해서 제게 느껴지는 아버지에 대한 부족한 소견이나마 적으려 합니다.

 행동에서 아버님은 서민이셨습니다. 아마 그 분이 부자였다면 그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고 서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도 서민이었고 마음까지도 서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분은 서민을 사랑하셨고 풍요로움의 교만보다도 없는 것에 대한 아주 작은 인정을 더욱 더 좋아하셨고 고통 속에서도 서로서로 도와주려는 서민의 아름다움을 아셨습니다.

 한가지 예로, 돌아가신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마당을 쓸다 신문 뭉치가 있어 펼쳐 보니 쇠고기 한근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어머니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고 고마움과 감사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짐작하건대 그것은 아마 잘 살지도 못하는 친구분이 주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고기가 절실하게 필요했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님이 왜 이렇게 유명하셔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은 서민들이 말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그것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비오는 날 과일을 살 때 주로 노상에서 사곤 하셨는데 한 곳에서 전부를 사시는 것이 아니라 세 군데에서 나누어 사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시면 아버님은 물질적으로는 손해지만 벌면 되고, 마음에는 평등한 사랑의 실천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바로 그것이 그분의 예술세계에 부각 되곤 했습니다.

 아마 아버님은 작은 것을 희생하면서 더욱더 큰 것을 가지려 하는 아름다운 욕심이 있었나 봅니다.

 지금 저의 눈에 비추어지는 아버님은 아주 큰 거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평범한 사람 눈에는 무능한 호인으로 비추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세계의 말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화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그림 속에서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그림을 보면 아버님이 살아 생전에 못한 무수히 많은 말들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저는 여기서 두 번째로 그림을 보면서 그분의 무수히 많은 말의 일부분을 적으려 합니다.

 아버님의 그림을 보면 흙의 일부가 캔버스에 묻어서 아주 자연스러운 그림을 나타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리 민족의 길과 장래 염원 소망 등 여러 가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님은 향토적이고, 우리나라 민족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것이 기본이 되는 흙의 진리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생각한 흙의 진리는 기독교 사상일 것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하신 말은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더니 멀어 멀어..." 하시면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버님의 그림을 보면 평화와 온유한 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자세히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리고 그림을 더 자세히 보면 인내, 절제, 염원 등이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고싶은 말들이 들려오곤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기도소리로도 들려오곤 합니다.

 "주여 더욱더 작게 해 주시고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윗 글은 아버님의 철학이 담겨져 있는 유일한 글입니다.

 선함과 진실함을 본다는 자체도 어려운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작업, 과연 이것이 평범한 견해일까요?

 아버님의 악이 없는 선한 인간이었다면 선함과 진실함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님이 욕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많은 사람의 평온함을 위해서 그리셨다면 선함과 진실함도 그림으로 쉽게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